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기적 해석가 Sep 19. 2021

삼킨 치약 그리고 영수증.

<조디악> 해석

 대부분의 추리 영화들은 말미에 사건의 진실이나 범인을 제시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조디악>은 사건의 진범을 끝까지 제시하지 않습니다. 1968년부터 1980년대까지 캘리포니아를 중심으로 활동한 조디악 킬러. 영화는 캘리포니아 크로니클 신문사의 삽화가 그레이스미스를 중심으로 조디악이라는 인물을 추적합니다. 엄청난 정보량과 사건들의 끊임없는 발생으로 관객은 피로감을 느낍니다. 그러나 이 피로감은 철저히 의도되었죠. 관객들이 피로감에 지쳐 수사를 포기하게 만듭니다.


 영화 <조디악>의 핵심은 식(食) 행위입니다. 먼저, 토스키 형사는 단 한 장면을 제외하고 항상 음식과 함께 등장합니다. 그는 동물 크래커부터 햄버거, 계란 등 음식을 찾죠. 단순한 고증일 수도 있지만, 의미를 조금 생각해봅시다.(동물 크래커의 경우 실제로 데이브 토스키 형사가 많이 먹었다고 합니다.) 식(食) 행위는 조디악 수사 그 자체를 상징합니다. 토스키 형사는 영화 중반, 동료의 샌드위치를 먹습니다. 그가 계란을 먹어도 되냐고 묻자 동료는 흔쾌히 다 내줍니다. 이후 동료는 조디악 수사에서 발을 뺐죠. 영화는 음식을 통해 지친 동료의 수사권을 토스키 형사에게 넘겨주는 방식으로 시각화합니다. 동료의 은퇴 날, 토스키 형사는 동료가 먹고 싶다던 일식을 먹어보라고 권합니다. 일식은 신선한 날 음식을 가공하여 만든 요리입니다. 마찬가지로, 수사도 신선과 가공의 특징을 동시에 갖습니다. 사건의 현장은 신선하게 보존하지만, 수사는 증거를 바탕으로 가공됩니다. 즉, 일식은 조디악 수사를 의미합니다. 토스키 형사가 동료에게 일식을 권한 이유는 수사에서 손 떼지 말라는 아우성입니다. 토스키 형사의 식 행위는 은퇴한 순간 멈춥니다. 그레이스미스가 다시 찾아와서 사건을 해결하기 전까지 음식을 먹는 모습은 보이지 않죠.


 이와 같은 맥락으로 그레이스미스의 경우를 대입해봅시다. 토스키 형사와 마찬가지로 그가 먹는 도넛과 커피, 중국 음식은 모두 수사 과정 그 자체를 상징합니다. 그러나 그레이스미스에 대해 필자가 관심을 가진 부분은 따로 있습니다. 바로 영화 극초반, 그레이스미스의 아들 애론이 삼킨 치약입니다.

Robert Graysmith : Spit.
Aaron Graysmth : I swallowed it.
Robert Graysmith : Why?
Aaron Graysmth : It was minty.

 애론은 치약을 삼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치약에서 매력적인 박하향이 낫기 때문이죠. 로버트 그레이스미스도 조디악을 삼켰습니다. 뱉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지만, 조디악이 풍기는 박하향의 미친듯한 인력에 이끌립니다. 애런이 치약을 삼킨 이후 그레이스미스는 조디악의 편지와 함께 신문사에 도착합니다. 즉, 애런이 삼킨 치약은 조디악을, 애런은 로버트 그레이스미스를 상징합니다.


 폴 에이버리는 주로 마약과 술을 먹습니다. 이는 그의 특징을 보여주죠. 폴은 조디악을 그저 지나가는 뉴스이자 가십거리로 여깁니다. 영화 초반, 폴은 조디악 킬러에 관심을 가지는 그레이스미스에게 왜 돕는지를 묻습니다. 그레이스미스는 자신의 호기심 때문이라고 대답하죠. 대답을 들은 폴은 당신에게는 돈이 되지 않는다며 비꼽니다.

Paul Avery : What's your angle, here? This is good business for everyone but you.
Robert Graysmith : What do you mean, "business"?

 폴 에이버리는 순전히 부와 명예를 위해서 조디악을 수사합니다. 야심한 밤, 특종을 위해서라면 리버사이드 살인 사건 증인을 홀로 만나러 가기도 하죠. 덕분에 유명세를 얻습니다. 하지만, 규칙과 과정을 생략한 행동은 수사의 방해 요소입니다. 그의 말로는 어떤가요? 조디악을 잊지 못하고 알코올과 마약에 중독되죠. 맨 정신으로는 살 수 없는 인생. 배 위에 집을 마련한 이유는 불안정한 그의 마음을 대변합니다. 배는 끊임없이 흔들립니다. 발 붙일 곳 하나 없는 바다에서 파도에 휩쓸리죠. 타인을 위하지 않고 자신의 안위만을 위해 행동하는 폴의 모습은 다음 대사를 통해 적나라하게 보입니다.

Do you know more people die in the East Bay commute every three months than that idiot ever killed? He offed a few citizens, he wrote a few letters and then he faded into a footnote.


 조디악의 두 번째 희생양인 브라이언 하트넬과 세실리아 셰피트. 연인인 그들은 나파의 한 공원에서 시간을 보내죠. 세실리아는 멀리서 기사의 옷을 입고 다가오는 한 남성을 발견합니다. 그는 조디악이었으며, 총을 겨누어 돈과 차를 빼앗고 남성과 여성을 칼로 찔러서 살해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범행이 발생하기 전 브라이언이 세실리아에게 한 말입니다. 브라이언은 나파는 침수당한 땅이며, 물속에는 마을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들이 바라보고 있는 고요한 수면 아래에는 수몰된 마을이 있죠. 나파의 잔잔한 호수는 사람들의 망각을, 사라진 마을은 지나간 뉴스를 상징합니다. 조디악에 대해서 수사하지 않고  심을 가지지 않는다면, 피해자들은 영원히 고통받습니다.


 자, 그러면 식 행위의 결말은 어디에 등장할까요? 영화 후반부, 그레이스미스가 토스키 형사에게 모든 사건의 전말과 알리바이를 해결하는 장면을 기억하시나요? 아서 리 앨런이 범인으로 지목되고 토스키 형사가 그의 이름을 말합니다. 그 순간, 종업원이 영수증을 끊어주고 갑니다. 즉, 영화의 食 행위는 마지막 장면의 영수증과 함께 끝납니다. 다시 말하자면, 조디악을 수사하는 과정(食 행위)은 그레이스미스의 <ZODIAC>이라는 책(영수증)으로 마무리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비극뿐인 전쟁.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