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은 자살의 철학적 방패인가

by 이기적 해석가

도덕적 잣대나 윤리적인 기준을 차치하고, 저는 한때 자살이, 고등 생물만이 할 수 있는 초월적인 행위라고 생각했습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행위는 생존 본능과 대척점에 있고, 자신의 존재를 이어가기 위한 생식 행위와 정반대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 누구도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스스로가 누구인지조차 모른 채 세상으로 내던져졌습니다. 그리고 태어난 순간부터 선택들의 연속이었습니다. 물론, 어렸을 때는 부모님이 그 선택을 대신해주기도 했지만, 점차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선택에 책임이 따름을 깨달아갑니다. 어떤 색의 옷을 입을지부터 진로나 인생의 갈림길까지 지금의 나는 과거의 선택으로 형성되었고, 그 과거의 선택들은 그 이전의 선택들의 결과라는, 거대한 일련의 과정을 깨달을 때, 숨이 턱 막히며 섣불리 다음 선택을 하기 두려워집니다. 실존주의는 이곳에서 탄생했습니다. 실존주의는 "인간은 자유로운 상태로 존재한다"라는 커다란 전제를 기반으로 합니다. '자유로운 상태'의 직접적인 예시가 바로 인간의 선택입니다.


물론 실존주의는 단순히 자유만을 강조하는 낭만적인 철학은 아닙니다. 오히려 고독, 부조리, 죽음에 대한 고찰을 다루는 어둡고 음침한 철학에 가깝습니다. 그 이유는 자유가 가진 양면성 때문입니다. 앞서 이야기했듯, 자유에는 책임이 따릅니다. 무언가의 선택은 다른 무언가의 포기를 의미합니다. 그렇기에 선택의 책임은 단순히 내가 고른 길에 대한 책임만을 뜻하지 않고 포기한 길에 대한 책임까지 포함합니다. 사르트르가 자유를 해방이자 고통이라고 말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제가 자살이 고등 생물의 초월적 행위라고 생각한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실존주의가 개인의 선택을 우선시한다면, 가장 궁극적인 선택은, 생명에 반하는 행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실존은 자살의 철학적 방패라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지요. 자살이야말로 가장 존엄한 상태의, 인간다운 죽음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윤리적, 도덕적 의견을 차치하고 말이죠)


하지만, 실존주의는 자살의 철학적 방패가 아닙니다. 카뮈는 <시지프 신화>에서 의미를 찾아가는 주체인 인간과 의미를 주지 않는 세계 사이의 간극을 부조리라고 명명하였고, 인생은 그 부조리의 연속임을 인정합니다. 이때, 부조리를 인식한 한 사람이 먼저 떠올릴 수 있는 방법이 자살이라고도 말한 바 있습니다. 카뮈는 자살에 대한 고찰을 이어가며 자살이 부조리한 상태의 해결책이 아님을 논증합니다. 자살은 부조리한 상태를 외면하는 회피이며 부조리한 상태를 인식하고 그럼에도 삶을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용기이자 해결책이라고 말합니다.

사르트르는 카뮈와 비슷한 입장이지만 자살을 하나의 선택지로 보았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르트르 또한 마찬가지로 자살을 선택하면 그 이후의 자유가 사라지기 때문에, 자살은 극단적인 자기부정 일 뿐, 해결책이 아니라고 논합니다.

정리하자면, 실존주의는 인간을 자유로운 존재라는 전제를 가지고 있기에 자살이라는 선택지는 그 자유로부터 회피하는 선택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사르트르와 카뮈 모두 자살에 대한 윤리적, 도덕적 논의를 하지는 않습니다. 그렇기에 이성적으로 명료하고 충분히 이해가 되는 논의입니다. 하지만, 삶이라는 고통 속에서 자살을 선택하지 않을 이유에 대한 명확한 설명이라고 와닿지는 않습니다. 당장 먹고살기 힘들고, 삶은 투쟁이며 타인은 지옥이고 당장 살아갈 이유보다 죽고 싶은 이유가 더 많이 생각나는 사람에게는 별 의미 없는 선문답처럼 느껴집니다.


꽤 오랜 기간 동안, 이 생각은 유지되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살해되려는 욕구> 집필을 시작하고 문장이 쌓여감에 따라 오히려 자살이 철학적 방패라는 믿음이 확고해졌습니다. 그러던 중 정말 우연한 계기로 그 믿음이 깨지는 순간이 찾아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