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lo world

이혼 후의 공부

by 버치카

많은 것을 사는 시절이었다.
온돌매트를 샀고, 새 침대를 사고, 삼탠바이미를 사서 조립했다.
가장 비싼 물건은 맥이었다.

내가 산 맥은 은색이었고, 손바닥으로 쓸어보면 놀랍도록 부드러웠다.
나를 어딘가로 데려가 줄 비행기 날개 같았다.

나는 혼자 있는 시간 동안 할 일이 필요했다.
침대에 누워 넷플릭스를 볼 수도 있었고, 집 안을 핀터레스트 이미지처럼 꾸밀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내가 바라는 것은—

한 분야에 몰두하는 일이었다.
그 세계 안에서 효능감을 느끼는 것.



물론 회사에서 근무한 지도 10년을 넘어가고 있었다.
나는 좀처럼 조직의 논리를 체화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상사의 메시지를 자주 씹는 바람에 공개적으로 비난을 받았고,
갑작스럽게 시작되는 관리자와의 상담을 받아들여야 했다.

눈물 없이는 내 생각을 말할 수 없었다.

절치부심하여 조직에 걸맞은 인간이 되고자 노력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내가 속한 조직이 변화하는 세상에서 살아남기에는
시스템적으로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지금은 나를 먹여 살리는 생명줄이지만,
나는 조직을 떠나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진짜 능력’을 가지고 싶었다.



내가 관심을 가진 영역은 코딩이었다.

코딩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뭘까.

“나는 언어에 자신이 있고,
컴퓨터 언어도 언어라고 생각해요.”

라고 대답한 적도 있었지만,
솔직히 말하면 그냥 있어 보여서였다.

주말에 맥을 들고 카페에 가서 VSCode를 켜 놓고,
까만 화면에 형광색으로 빛나는 코드를
몇 줄 적어 보고 싶었다.

정작 내가 적을 수 있는 건 고작

print('Hello World')

일지라도.



나는 코딩 테스트를 레벨 0부터 무작정 풀었다.
주말에는 파이썬을 가르쳐 주는 학원에 다녔고,
ADsP 시험에도 응시했다.

“도대체 왜 이런 공부를 하는 거예요?”

“그렇게 성격이 급해서는
코딩을 제대로 하기 힘들어요.”

강사가 내게 남긴 평이었다.
이 분야에 재능이 있다고 말해 주거나,
응원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나는 또
내 인생에 다시 없을 소비를 했다.

천만 원이 넘는 학비를 감당하며
대학원에 등록한 것이었다.

실은 그 돈은
차를 사고 싶어 모아 두었던 돈이었다.



회사가 끝나면 버스 정거장으로 간다.
2단으로 된 버스 문이 휘리릭 열리자마자
인간들이 겹겹이 쌓인 공간이 드러난다.

시작이구나.
교통카드를 대고 나도 몸을 우겨 넣는다.

도로 상황은 지지부진하다.
버스 기사는 브레이크를 자주 밟는다.

겨우 4차선 위에
차는 물론, 사람·자전거·폐지를 끄는 수레까지 엉켜 있다.

한참을 전진을 위한 겨루기를 하다가
드디어 수원역에 도착한다.

주위를 둘러볼 겨를도 없이
기차역으로 가는 에스컬레이터로 뛰어간다.

역 출발 시각까지 1분이 남았다.
플랫폼 번호 6을 확인하고
다시 숨 가쁘게 내려가는데,
기차가 감속하는 소리가 들린다.

오늘은 교통편에 무사히 안착하게 해 주는
행운의 요정이 내 편을 들어주었다.



회색 냉기가 흐르는 기차에 올라타,
무말랭이 같은 얼굴을 한 채
실려 있는 인간들 사이에서
내 자리를 찾는다.

B12라는 이름을 가진 좌석에 몸을 눕히고,
나는 눈 깜짝할 사이에 육체에서 이탈한다.

정신은 곧장
어린 왕자의 행성 B-612 근처를 지난다.

가스 분사 장치의 효율이 좋지 않은 듯하다.
나는 내가 원하는 것보다 몇 초 느리게 움직인다.

하지만 중요치 않다.
소행성이 태양빛을 가려 만들어 낸
조그마한 암흑 공간에서
팔과 다리를 뻗고,
몇 초간 편안함을 느낀다.

“이번 역은
우리 열차의 종착역인
서울역입니다.”

고개가 앞쪽으로 푹 꺾이더니,
정신이 우주에서 다시 열차 안으로 돌아온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터덜터덜 기차에서 내린다.



서울역 광장에서
4호선을 향하는 사람들의 흐름을 뒤따라간다.

지하철 안의 개개인은
모두 사적인 공간을 방어하기 위해
코어에 잔뜩 힘을 주고
꼿꼿이 서 있다.

나 역시 그 틈바구니에서
허리를 펴려고 노력하지만,
자꾸만 어깨가 굽는다.

맥이 들어 있는 백팩이
무거워서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내 어깨를 끌어당기는 것은
맥의 무게만은 아니다.

나는 매달릴 것이 없어서
헛된 것에 몰두하는 걸까—
너무 자주 회의에 빠진다.



다섯 정거장을 지나 내려,
카카오 지도를 보며
최적의 경로를 따라
팔다리를 열심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곳은 내가 살아가는 현세다.

효율이 떨어지는
가스 분사 장치 따위는
폐기 처분해야 한다.

나는 1.2km를
20분 만에 걸어야
5,500원짜리 학식을 먹을 수 있다.

신경 다발의 연결이 느슨하고
근육이 이완된 상태다.
걷는 것이 고통스럽다.

지금껏 나태하게 보내던
엉덩이 근육이
드디어 점핑을 시작한다.

이제 게임은 끝이다.

엉덩이까지 열심히인 마당에
별수 있나.

곧 몸 전체가
시속 3.6km로 언덕을 오르기 위해
동원된다.

심장이 뛰고
인중에 땀이 맺힌다.

이상하게 상쾌한 기분으로 도달한다.



드디어 학생 식당에 도착한다.
가방을 빈자리에 내려놓고
통창 밖의 푸른 잔디밭을 바라본다.

나는 신을 믿지 않으므로
누구에게 기도할 수도 없지만,
무척이나 호소하고 싶은 마음이 된다.

온 인류를 위한 신 말고,
나만의 수호신이 있다면.

전지전능할 필요도 없고,
오래된 장물에 깃든
퀘퀘한 신이라도 좋으니
강의실 앞 드넓은 잔디밭에
소환되기를 바란다.


“수호신이시여,
온갖 바이러스와 세균들로부터
나의 항상성을 지켜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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