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출 중, 보드게임 동호회에 가입했습니다
“오늘은 신입이 많아서 아이스브레이킹이 필요할 것 같네요.
‘타코캣고트치즈피자’부터 시작하죠.”
나와 신입들은 모두 묵직한 보따리처럼 분위기를 눌러앉히고 있었다. 긴 머리의 여자가 익숙한 손놀림으로 룰을 설명했다. 우리는 이해한 척 고개를 끄덕였다. 게임이 한창 진행되다 ‘고릴라’ 카드가 나왔다. 이때는, 어떻게 하라고 했더라.
“고릴라!”
생각보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나는 주먹으로 가슴을 두드리며 포효했고, 카드 더미로 손을 뻗었다. 긴 손톱 때문인지 한 박자 늦게 손을 올린 옆 사람 손에서 피가 났다. 모두가 놀라 나를 바라봤다.
하핫. 평화롭게 놀려고 나온 자리에서 본의 아니게 피를 보고 말았다. 아무래도 생존본능이 최대치로 올라가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연신 죄송하다고 사과했다. 다행히 보드게임 카페에는 후시딘과 밴드가 상비돼 있었다.
집을 나온 지는 이 주일쯤 됐다. 휴대폰을 챙기고 통장 잔고가 남아 있어 노숙을 하지는 않았다. 에어비앤비를 전전하다가, 역 근처 아파트에서 은퇴자가 하숙을 구한다는 글을 발견했다. 입주 조건은 간단한 자기소개서였다.
직장 발령 때문에 집을 구할 때까지만 머무를 예정입니다.
짧은 거짓말에 허락이 떨어졌다. 은퇴자의 집에 들어가기 전, 나는 다이소에서 돌돌이를 샀다. 머리카락이 우수수 빠져 방구석에 뒹굴던 시기였다.
하숙 생활은 놀라울 만큼 규칙적이었다. 은퇴자는 아침마다 생수 두 병과 수건 하나를 내주었다. 나는 욕실 바닥에 물을 흘리지 않으려 조심조심 샤워한 뒤 출근했다. 퇴근 후에는 캐리어에 옷가지를 담아 근처 빨래방으로 갔다. 세탁기가 돌아가는 동안에는 한식 뷔페에서 ‘먹었다’기보다는 ‘처리했다’는 느낌으로 식사를 했다. 다시 빨래방으로 돌아와 옷을 건조기에 옮긴 뒤, 도서관에 가 시덥잖은 사건이 이어지는 일본 소설을 읽었다.
인적 드문 아파트 산책로에 캐리어가 내는 돌돌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옷가지를 가득 넣은 채 끌고 가는 길 저편에 달빛이 유난히 환했다. 어쩔 수 없이 몹시 애틋한 마음이 들곤 했다.
그립다.
내 세탁기와 건조기가.
그럼에도 하숙집은 내게 이중생활을 가능하게 했다. 가출 중이면서도, 혼인의 끝자락에 서 있으면서도, 침대 없는 생활을 하면서도 나는 회사에서 아주 간신히 최소한의 기능을 유지했다. 버틸 수 있었다.
문제는 주말이었다. 거실에서 요가를 하는 은퇴자와 한 공간에 있는 것이 어색해 반강제로 외출을 했다. 아무 약속 없이 거리로 나오자 갈 곳이 없다는 사실이 또렷해졌다.
털어놓을 만큼 가까운 친구도 없었고, 가족에게는 아직 알리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주말을 통째로 슬퍼하는 데 쓰고 싶지도 않았다. 고민 없이 타인과 시간을 보내는 방법을 찾다 보드게임 동호회에 가입했다.
우리는 낮에 만나 일곱 시간 내내 게임을 했다. 타코캣고트치즈피자, 한밤의 수수께끼, 스플래쉬, 그리고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수많은 게임들. 평생에 걸쳐 배워도 될 게임을 그날 하루에 몰아서 배웠다. 문득 궁금해졌다. 나야 그렇다 치고, 이 사람들은 대체 어떤 연유로 소중한 주말을 이곳에 바치고 있을까.
“배 안 고파요?”
내 말에 여기저기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근처에서 햄버거를 사 먹었다. 어쩌다 보니 신입을 챙기는 역할을 맡은 긴 머리 여자와 같은 테이블에 앉게 됐다.
“썸남이 있는데요. 좀 웃겨요.”
그녀는 처음 본 우리에게 연애 고민을 털어놓았다. 나는 눈을 맞춘 채 이야기를 들었다.
“쓰레기든 괜찮은 놈이든 뭐 어때요. 그냥 즐겨요.”
너무 쉽게 말한다는 핀잔에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이었다. 인간과 대화하며 가볍게 웃어본 게.
이야기가 잠시 끊기자 여자가 기대하는 눈으로 나를 봤다. 인간관계에는 주고받음이 필요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나도 뭔가를 말해야 했다. 하지만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내가 사실 스물아홉이 아니라 서른넷이라는 걸, 남편을 피해 집을 나와 이혼을 할지 말지를 고민 중이라는 걸.
여자는 저녁을 먹고도 새벽까지 게임을 할 예정이라며 다시 보드게임 카페로 돌아갔다. 나는 방긋 웃으며 인사했다.
“다음에 또 봐요.”
마치 다음 주에도, 그다음 주에도 이곳에 나올 사람처럼. 아무 근심 없이 심심해서 동호회에 들른 사람처럼. 그렇게 말갛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