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은 끝나지 않는다
— 차원이동에 대한 단상
이 그림을 그리면서 한 가지 질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파프리카 하나가 무한히 겹쳐지며 같은 형태가 반복되고, 또 반복되고, 어디서 시작됐는지, 어디서 끝나는지 모른 채. 그냥 계속된다.
공간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가 지금 있는 이곳은, 정말 하나의 공간인가.
우리는 공간을 당연하게 여긴다.
여기가 있으면 저기가 있고, 이쪽이 있으면 저쪽이 있다. 공간은 고정된 무대처럼 느껴진다. 우리가 그 위에서 움직이고, 공간 자체는 가만히 있는 것처럼.
그런데 아인슈타인은 그 상식을 뒤집었다. 공간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휘어진다고. 질량이 있는 곳에서 공간은 구부러지고, 시간은 느려진다. 우리가 딛고 있다고 믿는 이 단단한 무대가, 사실은 끊임없이 출렁이고 있다는 것이다.
그림 속 파프리카가 겹치는것처럼.
차원이동이라는 개념은 오랫동안 공상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물리학은 진지하게 그 가능성을 탐구한다. 다중우주론은 말한다. 우리가 사는 이 우주가 유일한 것이 아닐 수 있다고. 무수히 많은 우주가 겹쳐 존재하고, 각각의 우주는 서로 다른 법칙으로 운영된다고. 그렇다면 차원을 이동한다는 건, 완전히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겹쳐 있는 층을 넘어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림 속 캐릭터들을 보면 그 느낌이 온다. 같은 존재가 서로 다른 층위에 동시에 새겨져 있다. 어느 것이 원본인지 알 수 없다. 모두가 원본이고, 모두가 복사본이다.
어쩌면 우리도 그런 존재일지 모른다.
라이프니츠는 공간이 사물들 사이의 관계라고 했다.
공간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들이 서로 맺는 관계 속에서만 성립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차원이동은 단순히 장소를 바꾸는 일이 아니다. 관계의 구조 자체를 바꾸는 일이다. 내가 속한 맥락, 내가 연결된 것들, 내가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 그것이 달라질 때 우리는 이미 다른 차원에 있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이미 매일 차원을 이동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같은 몸 안에 있지만, 전혀 다른 공간을 살고 있을 때가 있다. 같은 방 안에 있어도 누군가와 완전히 다른 세계를 경험할 때가 있다. 공간은 좌표가 아니라 인식이다.
그림 속 파프리카는 끝없이 겹쳐지며 아래로 이어진다.
끝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다. 별빛처럼 흩어진 반짝임들이 그 사이사이에 박혀 있다. 무한히 반복되는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층마다 조금씩 다르다. 같은 패턴인데 각도가 다르고, 같은 캐릭터인데 크기가 다르다.
연속적이지만 동일하지 않다. 이어져 있지만 똑같지 않다.
공간의 연속성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단절 없이 이어지는 것. 그렇다고 모든 것이 같은 것도 아닌. 하나의 흐름 속에서 끊임없이 변주되는 것.
우리의 삶도 그렇게 이어지고 있는 건 아닐까. 어제와 오늘 사이에 눈에 보이는 경계는 없지만, 우리는 분명 어제와 다른 층위에 서 있다. 그 미세한 이동이 쌓여 결국 전혀 다른 차원에 도달한다.
차원이동은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닐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미 매 순간 공간을 다시 정의하며 살고 있다. 새로운 관계가 생기면 세계가 달라지고, 무언가를 잃으면 공간이 다르게 느껴지고, 깨달음 하나가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층위로 나를 데려가기도 한다.
그림 속 끝없이 겹쳐지는 파프리카처럼, 우리가 사는 공간도 사실은 무수히 많은 층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는 건 아닐까.
우리는 그중 하나의 층을 살고 있을 뿐이고, 그 아래엔 아직 가보지 못한 무수한 세계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