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실에 모인 남자들은 마치 정물화 같았다. 어둡고 축축하고 생기 없는 정물화. 오래된 가족에게서 풍겨 나는 빛바랜 공기와 데면데면한 적막이 흐른다. 큰아들인 남편과 작은 아들인 시동생, 시동생의 큰아들, 큰 시누이의 남편, 우리 아들까지.
고도를 기다리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처럼 여자들이 차릴 점심을 기다리며 제목도 없고 결기도 없이 우두커니 어둠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몇 년 전만 해도 건강하셨던 시어머니가 분주한 설의 생기를 책임지고 있었다는 걸 이제는 모두 좀 알았으려나. 지난날 자식들 앞에서 집안 어른으로 든든히 배경이 되어 주셨던 분이었는데, 이젠 스스로 자신을 살필 수 없는 치매환자로 누군가의 돌봄의 손길을 필요로 하고 있다. 어머님도 초점 없는 눈으로 그림처럼 소파를 지키고 계신다.
막내 시누이 큰딸은 점심때가 넘도록 오지 않고 있었다. 이번 설엔 며느리인 내가 갈비를 재고 잡채를 만들어가기로 했고, 큰 시누이 막내 시누이가 떡국이며 만두, 전 등을 가져오기로 했다. 예정에 없던 막내 시누이의 성묘로 그녀의 큰딸이 음식 일습을 외할머니 댁으로 배달하기로 했다는데 감감무소식이다. 시간은 두 시를 넘기고 있었다. 1시 넘어서 도착한 나는 멍하니 손 놓고 있는 그들이 안타까웠다. 큰 시누이도 우리보다 먼저 와 앉아있었는데 음식 재료가 없으니 우두망찰이다.
급한 대로 밥을 안치고 가져온 갈비와 잡채로 일단 술상을 차려 남자들 앞에 대령한다. 이윽고 그들은 얼음 땡이 풀린 동네 소년들이 되어서 왁자지껄하다.
하... 뭐라 할 말이 없다.
우리 집안만의 문제는 아니겠지만 여자들의 손길이 없으면 자기 어머님 식사 하나 해결할 수 없는 남자들의 처지에 한숨이 나왔다.
밥이 되자마자 시어머니 식사를 챙겨드리고 나니 2시 반이 되어 식재료들이 도착한다. 뒤이어 성묘 갔던 막내 시누이가 편치 않은 표정으로 들어선다. 자기 딸을 야단치고 싶은 얼굴을 내가 가로막는다. 눈짓으로 도리질을 하니 얼른 말을 속으로 삼키는 표정이다. 어쩌랴, 다 큰 자식은 내 맘대로 하지 못하고 그럴 수도 없다.
설에 모인 늙은 사람들은 꾸깃거리는 얼굴과 심정으로 부엌과 거실을 채우고 있었다.
사십 대 후반이 되자 정확했던 생리가 띄엄띄엄 건너뛰었다. 오십이 되고 나서는 기다렸다는 듯 일의 순서가 조금씩 뭉개지고 기억력이 떨어졌다. 일상의 많은 부분에서 열의가 줄어들고 무슨 사안이든 그럴 수 있지, 하는 마음이 들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몸이 변하는 만큼 마음도 속도를 맞춰주진 않는 것 같다. 어떤 땐 중년처럼 보조를 맞춰주다가도 어떤 땐 철없는 아이와 같은 심정이 될 때가 있다.
그래서 어릴 적엔 사춘기가, 그 이후엔 갱년기가 삶에 적응하기 위해 거쳐야 할 다리처럼 놓여있나 보다. 이제 정말 몸은 노쇠의 길로 접어든 것인가.
완경이 되고 나니 작은 것, 버려진 것,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것들에 마음이 쓰인다. 나 스스로가 그런 처지인지라 동병상련의 심정이 되어가는구나 짐작할 뿐이다.
예전에 인생 서클을 한눈에 알 수 있게 표기한 그림을 본 적이 있다.
작은 생명으로 태어나서 기어 다니는 아기가 되고 어린 소년은 청년이 되고 장년의 나날을 보내다가 허리가 굽은 노년이 되는 내용이었다. 그때는 그 그림이 그저 의미를 알 수 없는 삶의 전반을 나타내는 것으로 인식했다. 그림대로라면 나의 지금은 인생의 후반을 막 시작하는 때다. 어릴 때, 시간은 계절처럼 눈앞에서 새롭게 완성되어 가는 것인 줄 알았다. 이제 보니 시간은 모래 속에 가만히 스며드는 물 같은 것이다. 물은 서서히 알지 못하는 사이에 모래를 적신다. 물에 적셔진 모래는 슬프다. 그렇게 생각하면 물이 모래를 적신다고 슬퍼지는 건 웃기는 일이다. 그러나 모래가 슬퍼한다고 해서 어느 누구도 손가락질하지는 않을 것이다.
늙어가는 것이나 노년 자체가 불행은 아니지만 청년의 나날을 기억하는 몸은 슬픔을 먼저 체득할 수밖에 없나 보다.
꽤 젊고 어린 나이에 시댁 식구들을 만났다. 관계 속에서 서로 상처 입히고 상처 입으면서 그들은 함께 늙어가는 처지가 되었다. 그들과 난 새파란 시절과 삶의 흥망성쇠를 함께 지나왔다. 이미 떠나보낸 내 부모님과 시아버지의 뒤를 이어 시어머니의 시간도 점점 작아지는 중이다. 삶의 겨울을 지나고 있는 이때 나무의 생장과 스러짐을 보는 것처럼 생도 어떤 지점에서 시간을 멈출 것이다. 우리가 멈춘 시간의 꼬리를 우리 아이들이 잡고 이어가겠지.
젊은 시절의 시간은 손에 잡히지 않았지만 시간 속에서 특정한 지점은 어김없이 우리 앞에 놓인다. 그게 늙음이기도, 죽음이기도 하다. 반드시 인간도 자연의 일부로 돌아갈 날이 온다. 다 같이 늙어가는 사람들 속에서 나는 어떤 늙음으로 완성되어 갈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후회가 적은 길로 들어서길 바란다.아직 설늙은 마음이 아직 도달하지 않은 잘 늙은 어떤 지점을 바라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