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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캐리소 Mar 10. 2023

연필로 그리는 스토리텔링




일 년 넘게 배우던 캘리그라피를 접고 같은 선생님께 데생 수업을 시작했다. 그림을 좋아하긴 했지만 그려볼 생각은 하지 못했다. 주변에 나이 지긋한 분들이 용기 있게 여러 가지 그림에 도전하는 걸 보면서 나도 소심하게나마 용기를 내보고 싶었다.


수업 첫날 선생님이 4B연필 두 자루와 지우개 하나를 수업 준비물로 주셨다. 학교 다닐 때 미술 시간에 사용해 보고는 꽤 시간이 지난 중년에 잡아본 연필이 새삼스러워서 신기했다. 필기구를 좋아해서 갖가지 캘리그라피용 펜이나 붓 펜을 써보긴 했지만 각 잡고 진지하게 4B연필을 쓸 일이 생길 줄은 몰랐다.


첫 시간엔 도형으로 형태를 잡는 법을 배웠다. 구와 원기둥, 그리고 빛의 위치에 따라 그림자를 표현하는 방법, 원뿔과 원기둥이 합해진 도형을 차례로 연습했다. 매주 하나씩 아무것도 없는 도화지에 내가 탄생시킨 형태들이 생명을 얻는 것 같은 기분에 묘한 즐거움이 피어올랐다. 뒤이어 상자와 여러 가지 모양의 컵과 기구와 그릇을 그려나갔다.


선이 지나간 자리는 수많은 생의 발자국처럼 흔적이 되어서 본래 가지고 있던 자기의 본모습으로 드러났다. 신기했다. 덧붙여 선생님의 칭찬도 내 연필을 춤추게 했다.

삐뚤빼뚤 실수를 하고 제대로 선 긋기에 실패해도 재능 있다고 칭찬하셨다. 그리기에 몰입하며 낑낑거리다가 선생님이 툭툭 던지는 칭찬에 어리둥절하기가 일쑤였다. 그럴 땐 보이지 않는 격려가 선 하나를 더 세심하게 긋게 하는 힘이 된다는 걸 느낀다.


데생은 수천 번의 선이 모여 하나의 존재를 탄생시키는 마술 같다.






연필을 보면 생각나는 사람이 하나 있다. 내가 좋아하는 친구로 일본 번역 작가이자 요양보호사인 이은주 작가다. 가장 작은 것을 귀하게 여기고 가장 약한 사람들 곁에서 섬기고 사랑하는 모습 때문에 그녀와 친구가 되었다.

처음 그녀의 집에 초대받아 갔을 때 액자 하나를 보고 깜짝 놀랐다. 그 속엔 이백여 개의 작은 몽당연필들이 빼곡하고 앙증맞게 들어차 있었다. 그걸 만든 이유를 물었더니 조카 손자를 키우며 같이 사용했던 연필을 그저 무심히 버릴 수 없어서 이렇게 연필 액자를 만들었노라고 했다.


그녀는 싱글인 몸으로 남동생의 딸이 낳은 아기를 자기 자식처럼 키우고 치매에 걸린 엄마를 돌보고 있다. 그녀 덕분에 나는 세상에는 다양한 가족의 형태가 있음을 알았고, 돌봄을 주는 일과 받는 일은 일방향이 아니라 쌍방향임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조카 손자의 역사가 담긴 예쁜 결과물을 액자로까지 만들어 간직하고 있는 그녀가 더 대단해 보였다.

그녀에게 내 그런 마음을 내보이면 종종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다. 그럴 때 나는 그녀가 기꺼이 안아들인 자신의 삶이 다른 사람에게 햇살 같은 용기를 준다는 사실을 스스로는 알지 못하는구나 하고 생각한다. 

천진하고 담백한 그녀의 행보가 그녀의 글처럼 해맑고 씩씩해서 좋다. 그녀를 안 지 4년이 넘었지만 늘 변함없는 성실함이 그녀의 연필 액자와 맞물려 내 마음에 있다.


탁자 위에 놓인 연필을 바라본다.

육각형 모양으로 생긴 연필엔 까만 바탕색에 진한 흰색으로 4B라고 인쇄되어 있다. 연필이 지나가면서 만드는 건 선만이 아니다.

어떤 무형의 형태에 머무르지 않고 향기로운 생의 한 면을 만드는 것 같다.



실수나 실패를 지적하지 않고 서투른 학생의 못난 선 중 가장 잘 된 선을 발견해서 기어이 칭찬하는 우리 데생 선생님이나, 작은 연필을 모아 다정한 사랑으로 감동적인 작품을 만들어낸 이은주 작가의 마음.

곧 내가 그리는 연필이 가는 방향, 이야기가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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