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방 너머 창밖에선 아랫집 할머니가 땅을 긁는 호미질 소리가 들린다.
흙을 파고 일구는 농부의 손에서는 생명의 힘줄이 불끈거리고 흙은 자신의 생명을 밀어올림으로 농부의 호미질에 화답한다.
땅과 인간이 하나 되는 화합의 장은 언제 보아도 조화롭다.
100년의 반 이상을 살아온 나는 무엇을 경작하며 살았나.
경작지의 넓은 헥타르를 언제 휘돌아 보았으며
어디서부터 일구기 시작했을까.
나는 나로 섰을 때부터 이미 경작할 땅이 있었다. 특별한 이유는 몰랐으나 이미 주어졌기 때문에 삶의 경작지에서 땅을 파고 갈아엎고 휘젓고 뒤집었다.
그것은 괴로움에 한껏 젖어들 만큼 어려웠고 힘에 부쳤다. 그러나 땅과 뒹굴면서 하나가 될수록 땅의 본래 주인이 내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주인은 누구인가?
확실히 나는 아니다. 난 땅을 창조하지 않았고 그러므로 땅의 모태가 아니다.
뜨거운 계절 아래 작물을 손보는 경작자의 위치는 살아냄과 어려움의 중심에 있었다. 거기에 더해 홀로라는 고독감이 더욱 경작의 어려움을 가중시켰다. 그러나 알고 보니 신이 내 곁에서 함께 땀을 흘리며 내 괴로움에 동참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땐 멍했다.
목적이 무엇이냐고 묻지 마라.
신도 우리들과 함께 나가고 신도 또한 추구하며 위기를 맞고,
신도 또한 투쟁에 휘말리니
(중략)
하늘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리지 않느냐?
그들은 부르짖는다.
그들은 무엇이라고 외치는가?
도와달라고!
그들은 누구를 부르는가?
너를!
모든 인간, 너를,
일어서라.
우리 임무는 질문을 하는 대신, 주먹을 불끈 쥐고 오름길을 올라가는 것이다.
- 영혼의 자서전, 니코스 카잔차키스 - p.582
그때의 안도감이란,
그때의 든든함이란,
그때의 감사함이란,
내 현실은 바뀌지 않았으나 그것을 알기 전과 안 후의 본질이 달라진듯한 경이감을 맛보았다.
농사를 지으려면 삽질도 해야 하고, 곡괭이 작업도 호미질도 마다하지 않아야 한다.
그런데 트랙터가 없다고, 남들보다 동력이 부족하다고 지레 겁먹고 내게 주어진 것들을 무시해 치우고 땀을 흘리기를 싫어하고 북 돋우기를 게을리한다면 농부로서 얻을 수 있는 수확은 꿈도 꾸지 말아야 한다.(내가 그랬기 때문에 안다)
그것이 내가 나에게 주는 경작의 팁이고 조언이며 위로다.
내가 경작하는 농작물은 이미 창조된 것이고 창조를 향해 가는 나는 그 실체를 향해 움직이면 되는 것이다.
한 발짝씩, 매일, 끊임없이, 묻거나 따진다면 경작의 가중됨은 내 어깨를 더 무겁게 짓누를 것이다.
왜?
이때는 '신성한 무관심'(지담 작가님 말씀)이 필요한 때다. 결과는 나의 몫이 아니므로!
나는 경작에 필요한 도구다.
도구가 도구로서의 행동과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으면 언제든 다른 도구로 교체될 수 있다.
그 사실은 엄연한 진실이며 개인적 소회는 경작에 도움이 되기보다는 걸림돌이 된다.
그것에 어떤 인식이나 깨우침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고 그저 오늘 하루치의 행동만이 경작의 비료가 되는 것이다. 내가 끌어올려야 하는 동력은 나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고 우주가, 신이 내게 부여한 것이다. 내가 무언가 이루고 싶은 욕구를 느꼈다면 이루어야 할 명제와 방법까지도 내 안에 부여된 것이다.
그러니 나는 그 방법을 경작하는 동안에 찾을 것이다. 땅 속의 보화가 발견될 때까지는 수만 번의 호미질이 수반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