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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성의 아이들

by 캐리소

당신의 아이는 당신의 아이가 아니다.
아이들은 스스로 갈망하는 삶의 아들딸이다.
아이들은 당신을 거쳐서 왔지만, 당신한테서 온 것은 아니다. 비록 지금 당신이 아이들과 함께 있을지라도 그들이 당신의 소유는 아니다.
당신은 아이들에게 사랑을 줄 수 있지만 당신의 생각까지 줄 수는 없다.
그들은 이미 자신의 생각을 갖고 있으므로.
당신은 아이들에게 육신의 집을 줄 수는 있지만, 영혼의 집까지 줄 수는 없다.
왜냐하면 아이들은 내일의 집에 살고 있으니까.
당신은 꿈에서 조차 갈 수 없는 곳에.
당신이 아이들처럼 되려고 애써도 좋으나, 아이들을 당신처럼 만들려고 애쓰지 말라.
삶이란 결코 되돌아가지 않으며, 어제에 머물지도 않는다.

- 칼릴 지브란 [예언자]



내 아이가 내 아이가 아닌 줄은 알고 있었다.

일찌감치 심리적으로 아이들을 멀리 떼어놓고 생각해 버릇한 결과다.


사춘기와 갱년기를 동시에 겪었다.

아이는 아이대로 나는 나대로 삶의 새로운 페이지를 열었다.

그래서 근본적으로 아이는 나와 다르고 나는 아이를 만든 자가 아님을 깨달았다.

첫째 아이를 통해 몸으로 직접 체화한 그때가 상흔처럼 남아 아픈 자국으로 만져질 때도 있었다.


내가 아이들에게 줄 수 있는 건 작은 사랑뿐이었지만 그마저도 성숙하지 못한 찌그러진 사랑이 아니었나 돌아보게 된다.

그래도 미세하게나마 위로가 되는 것은 아이들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크고 넓은 세계를 품고 있다는 것과 내게 그리 큰 사랑을 바라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냥 작은 미소 하나, 소박한 관심 하나, 자기를 바라보는 믿음직한 눈빛 하나였다.


그런데도 나는 비싼 엄마처럼 굴었다.

작은 것 하나도 부드럽게 주지 못한 서툰 엄마여서 너무 아쉽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어쨌든 우린 우리 앞에 놓인 환경이라는 무게를 짊어지고 가야 하니까. 그저 가야 했다.

아이들이 내게 크고 거대한 걸 바란 것도 아닌데 너무 인색했었다는 아픈 자각이 오래도록 내 뒤를 따라다녔다.


영혼의 집은커녕 정신의 집도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다. 내일의 집에 사는 아이들의 꿈에 대해 희미한 반응만을 보여왔던 것이다.


아이들을 나처럼 만드는 건 모래폭풍 속에 보금자리를 짓는 것처럼 사상누각이다.

어제에 머물지 않는 꿈을 가진 아이들,

오래 품고 키워가는 아이들,

포기하지 않는 근성의 아이들이 나를 뛰어넘어 훌쩍 그들의 우주를 건설할 것이다.


그래서 칼릴 지브란의 이 문장이 강렬하게 나를 찌른다.




금요일의 브런치북을 만들지 못했습니다.

다음주에는 귀엽고 장엄한 브런치북이 만들어져 금요일 자리에 콕 자리잡기를 바랍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독자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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