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함은 언제나 나의 포기, 에고의 소멸을 전제로 한다. 우리는 자아를 구원할 수 없으며, 단지 자아에서 벗어날 수 있을 뿐이다. 그럴 때 우리는 구원받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라는 불안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자아와 얼마나 동일시하고 있으며, 우리 자신에 관해 얼마나 모르고 있는지를 확인시켜 줄 뿐이다.
우리가 서서히 그리고 단계적으로 자아에 대한 집착과 경계구분을 의문시하고, 자신을 개방하는 법을 배울 때에만, 우리는 자신을 전체의 일부로 인식하고 전체에 대한 책임도 떠맡기 시작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전체의 행복과 우리의 행복이 똑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부분으로서 또한 동시에 모든 것과 하나이기 때문이다.
- 뤼디거 달케, 몸은 알고 있다.
세상에는 늙은 천사들이 많이 산다.
내가 가입한 돌봄 밴드에선 '죽음'은 음식을 만들 때 다루는 식재료처럼 일상적인 대화의 소재가 된다.
그들에겐 죽음은 매일 느껴지는 어떤 실체이기 때문이다.
돌봄 대상자의 자녀와 카톡으로 나누는 죽음의 대화.
그게 참 소중하고 달갑게 느껴지는 건 돌봄 대상자가 마지막까지 평안하기를 바라고 원하며 소망하는 사람은 바로 곁에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매일 밀착한 가운데 실 같은 생명이 가느다랗게 스러져가는 것을 지켜보는 분들은 영혼을 지키는 천사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세상 모든 아픔과 부족의 구멍은 사랑이 메꾼다. 몸과 마음의 아픔에서
치료의 수단은 사랑이다.
아픈 어르신들을 돌보는 선생님들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어느 천상의 소박한 산골에 작은 사람들이 큰 사랑을 공기처럼 내뿜고 있는 마을을 상상하게 된다.
그곳엔 허리통증과 피로가 엷게 깔려 있지만 사랑이 오로라처럼 흐르는 곳이라서 잠시 힘겨울 때도 결코 미워지지 않는 공기가 흐르고 있다.
어떻게 들으실지 모르지만 전 날마다 기도합니다. 어르신께서 자녀분들의 돌봄이 한계에 다다르기 전에(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닌, 물론 현재는 아닙니다) 주무시듯 편안하게 할머니 곁으로 가시라고요. 제 경험을 말씀드리면 그런 모습으로 돌아가진 친정아버지의 기억은 저를 정말 사랑하셨다는 확신에 웃으며 추억할 수 있거든요.
94세 할아버지와의 이별을 준비하는 요양보호사 안*자 선생님의 글은 포를 뜨듯 얇게 저민 사랑이다. 그걸 재료로 지어 올리는 밥 한 공기만큼 마음을 배부르게 한다.
17개월을 함께 지낸 어르신과도 담담하게 죽음의 얘기를 나누는 건 자신의 마음을 예쁘게 봐주신 덕분이라고 말하는 그분의 문장에서 '소울메이트란 바로 이런 모습이구나' 하고 납득하게 된다.
나를 포기하고 에고의 소멸을 바라지 않더라도 돌봄을 실행하며 그들은 이것을 생활로 가져오고 있다. 삶의 위대성은 이렇게 자신을 개방하여 또 다른 자신인 타인을 깊이 인식하는 데서 비롯된다.
전체의 행복과 나의 행복이 데칼코마니처럼 닮아있음을 느낀다.
귀엽고 장엄한 브런치북을 만드는 데 실패했습니다. 대신 진짜 크리스마스를 경험한 어제의 이야기를 짧게 들려드립니다.
다음 주엔 저의 소박한 계획을 이룰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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