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할 때 나는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오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무섭게 돌진했다.
뭐가 뭔지 모를 때여서 용감했을지도 모른다.
다 세팅해 놓은 내 생의 계획도 한 번에 바꿔 버렸다.
부모님도, 내 상황도 염두에 두지 않았다.
사랑 이면의 고통을 생각하지 못했으며 그저 몰두하는 행복이 컸다.
어찌 보면 순수한 무지가 나를 끌고 갔다.
종일 글 생각만 할 때가 많다.
수정해야 할 글을 프린트해서 가방에 넣고 다니며 틈틈이 다시 읽어 본다.
메모장이나 브런치 서랍에 들어있는 글을 꺼내 다시 수정한다.
아무리 애써도 내 욕망의 크기의 백 분의 일만큼도 달라진 느낌은 없다.
그래도 멈출 수 없다.
해도 해도 표 안 나고 끝이 없다는 점이 꼭 살림과 닮았다.
나는 글과 사랑에 빠져 있는 것일까?
하고 싶고, 해야 하고, 끝까지 붙잡고 싶은 것이 글이긴 하다.
글은 내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글을 쓸 때 가장 나다운 모습이 되고, 그때가 제일 행복하다.
글이 주는 쾌락이 고통보다 크다.
아직 크지 못한 내겐 고통도 소박하다.
살림과 사랑에 빠져 있는 사람이 있을까?
어떤 살림인지에 달려 있겠지.
살림이 사람을 살게 하는 도구는 맞지만 생의 의미까지는 아닐 것이다.
내겐 글이 살(生) 림(林)이다.
살기 위해 들어간 숲 속!
거긴 낯설고 위험하다.
하지만 수많은 생명이 산다.
글로 된 숲 속에서 난 생명의 근원을 발견하고 새로운 세상을 창조한다.
생의 의미를 만들기 위해서 택한 것이 글이다.
그러니 글을 잘 쓰고 싶다.
잘 쓰는 건 기가 막힌 문장을 뽑아내는 것도 있지만 내가 품고 있는 생각을 잘 직조해서 나와 독자에게 내놓는 것이 아닐까?
살림을 잘하려면 눈썰미가 있어야 하는데 기본적으로 난 눈썰미라는 걸 갖지 못했다.
그러니 그냥 쓰는 수밖에 없다.
믿음이 결여된 시선은 내 글의 초라함만 인식한다.
지금 쌓아가는 한 문장과 한 단어가 큰 숲을 만드는 한 삽의 흙이라는 것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글 생각을 하는 건지,
글을 쓰고 있는 내 운명을 바라보고 있는 건지
헷갈릴 때도 많다.
지금 읽고 있는 책에서 글을 쓰는 이유를 발견한다.
18세기말 영국의 철학자 제러미 벤담은 사람을 지배하는 것은 쾌락과 고통이라고 주장했다.
자연은 인류를 고통과 쾌락이라는 두 사람의 주권자의 지배하에 두어왔다. 우리들이 무엇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를 지시하고 또 우리들이 무엇을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다만 고통과 쾌락일 뿐이다. 한편으로는 선악의 기준이, 다른 한편으로는 원인과 결과의 연쇄가 이 두 개의 옥좌에 묶여 있다.
- 초유기체 인간, 정연보. P. 80
글을 쓰는 일은 고통과 쾌락이 함께 있는 구조다.
당장에 글을 쓰는 일이 -생각대로 잘 풀리지 않을 때는 더욱- 고통이다.
그러나 내가 원하는 글이 나올 것으로 기대하며 그 쾌락으로 보상받을 것을 믿기 때문에 진행이 가능하다.
쾌락이라는 말은 본성이 올바르게 작용할 때 느끼는 감각이므로 그것을 얻고 싶어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아직 난 어떤 수준에 오른 작가도 아니다.
그저 뒤뚱거리는 병아리가 되기 위해서 알에서 부화하는 중이다.
살림을 잘하려면 세간살이가 골고루 제대로 갖춰져 있어야 한다.
글 살림에 있어서 나는 어떤 세간살이를 갖추고 있는가?
문체? 나만의 철학? 지혜? 본질?
너무 비싸고 고퀄의 세간살이만을 탐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지금은 소박한 세간살이로 나하나 먹여 살리는 살림이라도 꾸준히 해야 할 판이다.
언젠가 살림을 관리하고 경영에 능숙해지는 날도 있을 것이다.
글을 대하는 마음도 물불을 가리지 않는 순수함으로 달려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