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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히면 안 되는 이름 _ 16화

“우리는 누군가의 가슴속에 깊이 새겨질 이름을 가지고 있다.”

by 벙긋 웃는 문혜력


정숙이


엄마와의 그런 일이 있고 난 다음부터, 정숙이는 꼭 필요한 경우만 제외하고 말을 많이 하지 않았다. 일도 이전처럼 과하게 하지 않았다. 정숙이뿐 아니라 나와 순자에게도 돈이 벌리는 즐거움이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눈코뜰 새 없이 일하고 돌아온 딸들은 나머지 집안일도 모두 도맡아 했다. 집에서는 찐빵이만 따라다니는 엄마였다. 나에게도 정숙이와 순자에게도 찐빵이는 귀여운 막냇동생이었다. 엄마가 그렇게 아들만 운운하는 것과는 별개로 딸들은 찐빵이가 예뻤다. 아끼는 것도 찐빵이가 원하면 망설임 없이 내주었다. 녀석이 장난감으로 망가뜨리는 일이 다반사였어도 마냥 사랑스러웠으니까.


그러나 찐빵이 출생 이후로 엄마는 당신의 편의에 따라 딸들을 이 모양 저 모양으로 부리면서, 찐빵이에게는 누나들의 장난도 용납하지 않았고 지나치게 그를 보호함으로써 자식들 간에 편 가르기를 하고 있었다. 그래도 지적하는 사람이 없으니 엄마는 자신의 행동이 딸들의 마음을 얼마나 상하게 하는지 가늠할 수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그렇게 경우가 바르다고 하는 엄마가 딸들의 노동은 당연하다 여기는 것 같았다. 그동안 키워준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거라면 어디까지 해야 하는지 딸들은 몰랐다. 아버지는 모든 살림을 엄마에게 맡긴 상태이기 때문에 아버지도 소처럼 일만 했지 가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딸들에게 용돈을 주는지 급여를 주는지 모르는 눈치였다. 아니, 아내를 믿고 있었기에 아내가 결정하는 일은 아버지에겐 무엇이든 옳았다. 우리가 순진했던 걸까? 그래서 그 당시 다른 집도 그런 경우라면 다 그렇게 살고 있다고 믿었던 걸까? 우리는 가끔씩 받는 몇 푼을 가지고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러다가 정숙이가 급여얘기는커녕 용돈을 조금 올려달라고 엄마에게 말했다가, 먹여주고 재워 주는데 계집애들이 어디를 쏘다니고 싶어서 돈타령이냐는 말로 우리를 충격에 빠뜨렸다. 세상에, 우리 엄마 맞아? 신경을 쓰게 되자 나는 여지없이 앓아누웠고, 정숙이는 나와 순자에게 얼마 안 되는 돈을 모두 빌려 집을 나갔다. 순둥한 순자만이 엄마가 시키는 대로 이제 가게에서 음식을 만드는 일에도 관여하게 되었다. 엄마는 머리를 동여매고 계집애들 때문에 머리가 아프다고 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동네사람들은 엄마를 계모인 줄 알았다고 한다.



집을 나온 정숙이는 고등학교를 나왔던 터라 취직이 어렵지 않았다. 이제 엄마 아버지와 떨어져 세상에 홀로 서기로 굳게 다짐한 반면 두렵기도 했지만, 그녀는 특유의 성실함과 씩씩함으로 건축사무소에 일자리를 얻었다. 직장은 그녀에게 생소하면서도 흥미로운 곳이었다. 도면 작업부터 자재 관리까지 다양한 일이 오갔고 배울 것이 많았다. 무엇보다도 좋았던 것은 일을 한 대가로 달마다 따박따박 돈이 나온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장은 거처를 구할 돈이 없어 사무실 한켠에 형편없는 살림살이를 숨겨두고 불안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식사는 가까운 국밥집에서 해결했다. 그렇게 식사는 하루에 한 번 했고 잠은 사무실 책상에 엎어져 잤다. 일찍 일어나서 사무실 청소를 말끔히 했고 주전자에 물도 끓여 놓았다. 그곳에서 그녀는 동갑내기 동료 마태호를 만났다.


태호는 또래들보다 훨씬 어른스러운 사람이었다. 도면을 그리는 손길은 섬세했고, 현장에서의 상황도 훤히 꿰뚫고 있었다. 자재 거래처 사람들도 그를 신뢰하며 어려운 부탁도 흔쾌히 맡겼다. 정숙이는 태호의 부지런함과 책임감에 감탄했고, 그런 정숙이를 바라보는 태호의 눈빛에는 따스함이 담겨 있었다.


취직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태호는 용기 내어 정숙이에게 결혼을 제안했고, 그의 진심 어린 고백을 그녀는 속시원히 받아들였다. 두 사람은 서로를 의지하여 회사일에도 더 힘이 났다. 태호는 빨리 결혼을 하여 정숙을 편히 있게 하고 싶었다. 그러나 정숙은 태호가 자리 잡을 때까지 함께 일하겠다고 그를 설득했다. 태호는 우선 사무실에서 불편하게 지내는 정숙을 자신의 거처로 옮기게 하였고 사무실 사람들에게도 그들의 결혼발표를 하였다.


두 사람은 결혼을 약속하고 인사를 위해 집을 찾았다. 정숙은 긴장된 표정이었지만 태호는 오히려 담담한 태도로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안심시켰다. 아버지 엄마 앞에 선 태호는 자신을 정중하게 소개하며 진심 어린 목소리로 정숙과 결혼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그의 단정한 태도에 아버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엄마는 태호를 유심히 바라보며 갑작스럽게 물었다.


"그래, 성이 뭐라고 했었지?"


태호는 고개를 숙이며 또렷한 목소리로 답했다.

"마 씨입니다."


그러자 엄마의 표정이 일순 굳어졌다. 그녀는 작은 한숨을 내쉬더니, 곧 태호를 타박하기 시작했다.

"마 씨라니... 천한 성씨 아니냐? 그런 집안 자손과 우리 정숙이가 어울린다고 생각하는가?"

그녀의 말에는 멸시와 실망이 섞여 있었다.


정숙은 당황한 얼굴로 엄마를 바라보며 애써 진정을 시도했다.

"엄마, 지금 시대에 그런 걸 따질 필요가 있나요? 태호 씨는 성실하고 착한 사람이에요. 제 눈엔 그게 더 중요해요."


하지만 엄마는 계속 말을 이었다.

"집안이라는 건, 그 사람의 뿌리와도 같은 건데..."


정숙이 태호의 얼굴을 보며 울컥하는 마음을 애써 누르는 모습을 본 내가 참다못해 말했다.


"엄마, 마 씨를 옛날 사람들이 천하다고 여긴 것은 역사적인 신분 제도와 직업에 따른 차별 등 복합적인 요인에서 시작된 거예요. 이러한 인식은 과거의 유물일 뿐이라고요. 지금은 어떠한 정당성도 가지지 못한다고요."


"얼씨구! 너는 그저 입만 살았구나!"

엄마는 이때가 기회다 싶었을까? 평소 엄마의 성에 찰 만큼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나에게 핀잔을 주는 듯 했다. 그러자, 아버지가 드디어 입을 떼었다.

"연임이 말이 맞지 않소? 나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정숙이 요 녀석이 언니보다 먼저 결혼을 한다니 좀 당돌하긴 한데, 사람은 제대로 고른 것 같소. 하하하하"


그날, 나와 순자는 오랜만에 본 정숙이와 태호를 위해 따뜻한 밥상을 내었고 아버지는 가게의 귀한 반찬거리들을 싸서 두 사람이 가는 길에 챙겨주었다. 그들은 그렇게 결혼했다. 정숙아, 진심으로 결혼 축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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