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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히면 안 되는 이름 - 17화

“우리는 누군가의 가슴속에 깊이 새겨질 이름을 가지고 있다.”

by 벙긋 웃는 문혜력
어리석은 도피


정숙이가 없는 집은 쓸쓸했다. 정숙이는 내게 동생이라기보다 친구에 가까웠으니 말이다. 순둥이 순자나 그 아래로 혜자나 봉숙이가 있었지만, 나이차이 때문인지 솔직히 정숙이 한 명만 못했다.


오는 손님을 상대하는 데 있어 나는 이제 그렇게 신경 쓰지 않고도 무심하게 일처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정숙이가 없으니 말이 더 없어진 나는 수많은 사람들을 상대하면서도 시장이 돌아가는 것과 사람들이 무슨 말을 나누면서 지내는지를 감지할 수 있는 눈과 귀가 생겼다. 참 남의 집 얘기가 그렇게 재미있나? 시장 사람들은 이 집 저 집 이야기를 수면에 떠 올려 누구네는 참 안 됐다는 둥 그게 다 조상 탓이라는 둥, 누구네 아버지가 가게가 잘 되니 바람이 나서 여자하나를 데리고 들어왔다는 둥 하면서 이야기를 비밀인양 큰 목소리로 주고받다가 결국 탄식과 동정으로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이 사람들 참... 하루는 연임이네 딸들은 인물이 모두 좋다 하면서 자기들끼리 우리 집 다섯 딸들을 평가했다.


그중에 혜자가 인물이 가장 좋다는 말이 돌면서 아들 있는 점주들은 혜자를 눈여겨보고 있다고도 했다. 그것이 사실인지는 증명된 바 없지만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무엇을 어쩌겠는가? 혜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저 그들의 심심풀이의 소재가 되고 있다고 생각하니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혜자는 시장에 나오는 일이 거의 없었다. 자신의 필요가 급박할 때 가게에 나와서 아주 가끔 책값을 타 가곤 했다. 혜자는 나처럼 글자와 친했다. 부러운 것은 몸은 가녀려도 체력이 있어 모든 지적 활동에 거침이 없다는 것이다.


정숙이가 가끔 그런 혜자에게 책 사는 데 사용하라며 넉넉한 용돈을 찔러 넣어주곤 했고 봉숙이는 그게 부럽기도 하고 아니꼽기도 했다. 봉숙이는 엄마 아버지가 무서워서 어쩔 수 없이 공부하는 아이였고 집안 식구들이 그걸 모를 리 없었다. 정숙이가 공연히 책값에까지 욕심을 내는 봉숙이에게 한 마디 했다.

"봉숙아, 책 필요하면 먼저 사고 언니한테 달라고 해. 얼마든지 줄게."


정숙이의 생활은 우리 집에서 지낼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이 풍족해 보였다. 정숙은 집과 자신을 꾸미고 남편과 아이들을 챙겼다. 정숙에게 남편 태호가 자리 잡을 때까지 함께 일하겠다는 의지가 있었으나 딸 둘을 연년생으로 낳는 바람에 할 수 없이 일을 손에서 놔야 했다. 그런데도 태호의 일이 잘 풀려가는지 정숙이는 부족함 없어 보였다. 조카들은 항상 비싼 원피스를 입고 있었고 정숙이의 옷차림은 지금껏 보지 못한 귀부인의 그것 그 자체였다. 명절에 태호는 큰 차에 정숙이와 두 딸을 데리고 와서, 시장에서는 구경해 본 적도 없는 큰 과일 바구니며 고기 등을 가져와 식구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엄마도 더 이상 그를 타박하지 못했다. 나는 그녀의 그런 물질적인 삶의 상승보다 집에서 떠나 자신만의 세상을 가지게 된 것이 몹시 부러웠다.


나도 확 시집이나 가 버릴까? 사실 엄마도 집에 있어봤자 입만 하나 더 보태고 있는 내가 얼른 시집이라도 갔으면 하고 바라는 지도 알 수 없지 않은가? 이런 나의 생각과는 달리 혜자가 먼저 시집을 가겠다고 나섰다.

"아니, 남자를 어디서 구해 온 거지? 공부만 하는 줄 알았더니?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더니. 큰 언니도 있고 셋째 언니도 있는데 지가 먼저 시집을 가겠다고? 넷째 언니는 정말 별로야!"

봉숙이가 혜자의 결혼 선포에 눈동자의 방향을 잃은 채 나와 순자를 향해서 웅얼거렸다.


혜자는 대학 선배의 소개로 만난 선배의 남동생과 결혼을 했다. 그는 사관학교를 나와서 우리나라에서 손가락 안에 꼽히는 의류회사에 입사하였고 어디를 봐도 촉망받는 젊은이였다. 부모가 이미 기반을 잡아놓은 상태로 모두가 부러워할 만한 혼처였다. 혜자는 결혼하자마자 시부모를 모시고 현모양처의 삶을 시작하였다.


그러고 나서 우리 셋은 모두 시쳇말로 별 볼일 없는 사내들을 만나서 각각 결혼이라는 것을 했다. 나와 순자의 남편은 키가 훤칠했고 인물이 좋았으나 경제적 능력이 부실했다. 봉숙이 남편은 봉숙이보다 키가 조금 더 컸다. 후에 봉숙이 남편은 부자가 되지는 못했지만 죽을 때까지 성실함으로 자기 식구들을 건사했다. 그러나 나와 순자의 남편은 가정에 마음을 붙이지 못하고 겉돌다가 결국엔 아이들만 낳아 놓고 집 밖으로 배회하게 된다. 그 중심엔 엄마의 있는 자식과 없는 자식에 대한 차별과 아들과 딸에 대한 차별이 큰 몫을 하였다.


엄마에게 1순위는 아들이었고, 그 다음으로는 능력있는 자식이었고 나머지는 쓸모없는 존재였다. 한 참을 더 가르쳐야 하는 존재였고 언제 깨우침이 있을지 알 수 없는 모지리들이었다. 나는 그렇다치고 순자와 봉숙이까지 엄마에게는 참 한심한 존재들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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