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잊히면 안 되는 이름 - 18화

“우리는 누군가의 가슴속에 깊이 새겨질 이름을 가지고 있다.”

by 벙긋 웃는 문혜력
더부살이


입하나 더는 홀가분함으로 나를 결혼이라는 이름으로 놔줄 것 같았던 엄마는 그를 지독히도 싫어했다.

"눈높이가 겨우 그것밖에 안돼? 겨우 골라 온 게 고아야?"

어이가 없어서 말문이 막혔다.

"엄마, 우리는 모두 언젠가는 고아가 돼요. 그렇게 따지면 엄마도 고아나 다름없잖아."

나는 남편 될 그를 변호한답시고 엄마를 공격했다.

엄마는 흠칫하더니 정말 화가 났는지 얼굴이 빨간 무가 되었다.

"뚫린 입이라고 아주 막 나가는구나? 그래, 너는 부모밑에서 자랐어도 이모양인데 그렇지 않은 누구는 오죽할까?"

그에게 부모가 물려준 1000평의 땅이 있다는 사실을 나중에서야 알게 된 엄마는 마지못해 결혼을 승낙했다. 아버지는 짐을 꾸려서 살림을 나가는 나의 등을 말없이 토닥여 주었다.


그와의 합의하에 결혼식을 생략했다. 엄마에게는 큰 흉이 될 신랑 측 부모의 빈자리도 마음에 걸렸고 사람들이 엄마와 비슷한 생각으로 이러쿵저러쿵하는 것도 싫었다. 식을 못 올려서 흉을 볼테면 보라지. 그건 오히려 아무렇지도 않았다.

"연임씨, 열심히 일해서 그동안 맘고생한 거 모두 보상해 줄게."

"고마워, 상훈 씨. 그렇지만 보상이란 말은 빼둬요. 당신은 잘 못 없어."


그는 호기롭게 1000평의 땅에 고인이 된 시아버지가 하던 대로 꽃을 키웠다. 꽃들은 탐스러웠고 그 꽃들만큼이나 사랑스러운 큰 딸 금이가 태어났다. 엄마와 혜자가 금이를 위한 한돈 반짜리 돌반지를 해 왔다. 정숙이는 엄지손가락 반 크기의 금돼지 팔찌를 금이의 손목에 걸어주었다. 순자와 봉숙이는 이른 시간부터 우리 집에 와서 돌상을 준비해 주었다. 찐빵이도 어느새 의젓한 국민학생의 모습으로 금이의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신기해했다. 금이의 돌잔치를 하는 해에 혜자도 딸을 낳았다. 혜자를 닮길 바랐는데 혜자의 고모를 닮아버렸다. 둘째 강산이가 태어났다. 딸밖에 없는 집안에 첫아들이라고 엄마 아버지 모두 정말 좋아했다. 동생들도 내 아들 강산이를 예뻐했다. 꿈만 같았다. 강산이를 통해서 내가 모두에게 받아들여지는 이 느낌... 이것이 행복이라는 걸까?


아쉽게도 그 행복은 여기까지였다.


어느 날 우박이 심하게 쏟아졌다. 그것도 한 여름에! 왜지? 꽃들이 다 죽어버렸다. 남편은 어쩔 줄 몰라했다. 나는 엄마 몰래 아버지에게 돈을 빌렸다. 꽃을 공급하지 못하니 거래처도 끊어졌다. 시간이 지나면 회복될 줄 알았는데 결국 땅을 담보로 빚을 내어 살았다. 그동안 일자리라도 알아보겠다고 나선 남편은 도박에 빠졌다. 어리석게 한방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걸까? 그가 밖으로 도는 시간이 많아졌고 아버지에게 빌린 돈에 대한 사실을 엄마가 알게 되었다. 내 예상과는 달리 엄마는 그 일을 모른 체하였다. 더 큰 문제가 생겼다. 1000평의 땅도 더 이상 우리의 것이 아니었고 집까지 내어주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아버지의 설득으로 나는 우리의 살림을 최소한으로 줄여서 친정으로 들어갔다. 아이들을 위해서 엄마의 구박은 잠시만 견디자 마음먹었다. 엄마는 나를 보더니 의외로 측은해하였다. 찐빵이가 하교하기 전에 엄마는 금이나 강산이를 업고 시장을 어슬렁어슬렁 집에서 가게까지 여러 번 걸어 다녔다. 금이의 손을 잡고 강산이를 업고 다닐 때도 있었다. 그런 엄마의 뒷모습에 나도 모르게 울컥했다. 가게에는 이제 아버지와 직원들이 있었고 엄마에게 약간의 여유가 생긴 듯했다. 그 틈에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에는 무엇이 있을까 하여 집 밖으로 돌아다녔다. 어디를 가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체력을 바탕으로 하는 일은 고사하고 해 본 일이라곤 가게에서 손님에게 돈 받고 거스름돈이나 거슬러주던 일이었는데, 그게 무슨 일의 축에나 낄 수 있겠는가? 가출인지 외출인지 알 수 없는 남편의 부재가 나를 더 거리로 내몰았다. 엄마의 가게에서는 나를 써 줄 마음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막막했다. 그러나 식구들에게는 나의 막막함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곧 다시 우리들의 보금자리로 돌아가리라 다짐해 보는 나였다. 참 잘 살아보고 싶었는데 이게 무슨 꼴이람!


남편이 돌아왔다. 죄인처럼 친정집에 들어온 키 큰 사내의 눈은 공허했다. 순간, 절대 그렇게 되고 싶지도 않고 그래서도 안 되는 우리의 미래가 이제 글렀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이런 쓸모없는 직감 같은 것은 갖다 버리자! 나는 머리를 털고 그를 안방으로 안내했다. 출입문에서 안방까지의 그 짧은 거리가 왜 그리도 길게 느껴졌는지 모르겠다.


"엄마 아부지! 남서방 왔어요."

keyword
작가의 이전글잊히면 안 되는 이름 - 17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