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잊히면 안 되는 이름 _ 19화

“우리는 누군가의 가슴속에 깊이 새겨질 이름을 가지고 있다.”

by 벙긋 웃는 문혜력
이별


엄마 아버지를 부르는 나를 그가 붙잡았다. 그는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아이들이 있는 우리 방문을 열었다. 몸을 웅크리고 종이를 찢어 모양을 만들며 놀던 금이와 강산이가 문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잠시 멈칫하더니 눈동자가 밝아졌다.

"아빠!"

아이들의 입에서 튀어나온 정겨운 호칭이었다. 그에게는 실로 오랜만에 듣는 호칭이기도 했을 것이다. 아이들이 아빠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아, 아빠 냄새!"

"아빠의 옷에 바람이 묻어있는 것 같아. 시원해."

아이들은 그의 옷에 얼굴을 부비며 한 마디 씩 했다. 아이들을 잠시 꼭 안고 있던 그가 말했다.

"쉿, 할머니 할아버지 뵙고 올게."

남편은 금지된 인사라도 나눈 것처럼 자신이 없어 보였다. 그는 곧 아이들을 자신에게서 떼어 놓았다. 안방에서부터 새어 나오는 알 수 없는 기운에 천천히 기가 눌려서 그의 모든 행동은 세상에서 허락받지 못한 것처럼 되어가고 있었다. 안방으로 걸음을 돌리는 그는 내 남편도 아이들의 아빠도 아닌 차갑고 낯선 얼굴의 사내였다. 나는 안방에 들어가서 남편옆을 지켜주고 싶었다. 그렇지만 안방에서의 대화내용이 눈앞에 선명하게 그려진 나는 들어가지 않기로 했다. 그 자리를 피해 주는 것이 그를 덜 작아지게 할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들어오게."

아버지의 음성이 귓가에 퍼뜩 들렸다. 나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그를 엄마 아버지에게 넘겨주었다. 엄마는 예상대로 그와의 눈 맞춤을 피했다.

"여기 있을게. 금방 나와요."

나는 그에게 속삭였고 그는 표정 없이 고개만 까딱했다. 분명 엄마의 비난과 잔소리가 그를 훈계하리라. 아버지는 옆에서 남서방을 거들긴 하겠지만 엄마 앞에서는 어림없지. 아이들도 나도 안방문 앞에서 하염없이 그가 얼른 나오길 기다렸다.


그의 표정으로 직감하건대, 우리의 핵심 과제인 경제적 해결책을 가져오지 못했을 것이다. 남편과 아버지의 역할이라는 도의적인 부분을 떠나서, 나와 아이들이 그에게 짐일 수도 있겠지? 이와 비슷하려나? 엄마 아버지의 짐칸에 그와 나, 그리고 내 아이들이 위치하고 있을지도 알 수 없잖은가? 그 짐을 혐오한 나머지, 엄마 아버지는 어려움에 처한 사위를 단번에 무책임한 인간으로 만들어서 회복의 시간이라는 개념을 없애버렸다. 그는 그저 패배자이면서 일어서면 안 되는 무능한 인간이었으니, 그에게 딸린 처 자식도 그의 소속인 이상 곱게 보일리 만무했다.


이 집에 다시 들어오는 게 아니었다. 엄마 아버지도 딸이 힘든 것을 두고 보기가 답답했으리라. 하지만 그 모든 원인을 그에게만 묻는다는 게 비겁하다. 그의 무능이 영원할 것이라고 못 박는 행위도 잘 한 건 아니지. 그렇지만, 엄마 아버지에게 기생하기로 한 내 결정은 더 큰 잘못이다. 일선에 나서서 막일이라도 하여 남편을 도울 기량이 없는 자포지기의 이 허약한 나 자신이 원망스럽다. 극단적으로, 이 역할놀이를 멈추고 싶다. 어차피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도 못할 것이니. 모두 자신 앞에 벌어진 일들을 큰 손 내밀어 해결할 아량이나 여유가 없어 보인다. 모두가 부족하다. 그 책임의 크고 작은 공들을 어디론가 튕겨보려는 어수룩한 몸부림이 강하거나 약한 모습으로 가장한다. 나를 포함해서. 이런저런 핑계와 공격, 그리고 합리적으로 보이는 갖가지 자기 방어적 변명으로 말이다. 정신 차리자. 나는 엄마니까.


그가 나왔다. 아이들이 다시 그에게 달려든다. 그는 헤슥한 얼굴로 아이들을 양팔에 들쳐 안고 우리 방으로 들어간다. 나는 또 다짐한다. 정신 차리자. 나가서 뭐라도 하자. 쓰러져 죽기라도 하겠는가? 그의 등을 쓰다듬어주고 싶었다. 그러기에는 내 손의 온기가 너무 약했고, 그의 등은 너무 차가워 보였다. 그의 뒤통수도 쓰라렸고 아이들의 천진난만함도 아팠다. 엄마 아버지도 딱해 보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죽을 쑤어 먹든 누룽갱이를 말려 먹든 분리가 답이다.


그날, 그는 하룻밤을 보내고 다시 그 흔한 레퍼토리인 '돈 벌러' 집을 떠났고, 나는 사랑스러운 나의 막내 밀감이를 얻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잊히면 안 되는 이름 - 18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