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로 돌아왔다.
<블랙미러>는 저의 최애 시리즈 중에 하나입니다.
전 시즌이나 전편의 내용을 기억할 필요가 없는 단편 옴니버스 구성은 날로 늘어가는 저의 건망증에 대한 스트레스 지수를 감소시켜 줍니다.
《블랙미러》는 최첨단 미래기술을 소재로 그 부작용을 현실에 투영한 드라마입니다.
하지만 AI 시대에 접어든 지금, 초중반 시즌이 방영되던 시기에 비해 그 기술들이 더 이상 미래처럼 느껴지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지나치게 현실적이어서 더 섬뜩하죠.
이 드라마의 진짜 공포는, 특별히 큰 사건이 벌어지지 않아도 기술 그 자체가 스릴러가 된다는 점입니다.
누군가 죽지 않아도 일자리를 차지해버리는 AI 같은 기술 자체가 공포 입니다.
개인적으로 유토피아는 판타지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블랙미러》가 전달하는 메시지는 더없이 현실적입니다.
모든 기술은 결국 권력을 향해 있습니다.
그리고 권력은 나누기를 싫어합니다.
권력은 기본적으로 통제의 메커니즘을 활용해 자신을 확장합니다.
그리고 기술은 그 통제를 강제성과 자율성 모든 면에서 견고하게 만들어 줍니다.
《블랙미러》는 폭주하는 기술과 윤리의 충돌에 대한 경고라기보다는, 이젠 그냥 예고이자 통보에 가깝습니다.
우리는 정말 기술을 ‘사용’하고 있는 걸까요? 아니면 기술의 세계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적응’하고 있을 뿐일까요
《블랙미러》 시즌 7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여섯 편의 에피소드 모두가 본질적으로 같은 기반의 기술—즉 인간과 컴퓨터를 연결하는 뉴럴링크 시스템을 중심에 두고 있다는 점입니다.
에피소드마다 설정이나 배경은 달라 보일 수 있지만, 결국 모두 인간의 뇌와 기계가 직접 연결되는 기술적 상상 위에 서 있습니다.
이는 한편으로는 소재의 고갈을 의미합니다.
더 이상 ‘새로운 기술’을 상상하기보다, 우리가 현실에서 이미 마주하고 있는 기술의 끝단을 조금씩 비틀어 변주하는 방식이 주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시리즈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수 있을지는 다소 의문입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면, 이것은 오히려 인류 기술이 실제로도 막다른 골목에 도달하고 있다는 징후일지도 모릅니다.
‘사물 인터넷’의 마지막 단계는 결국 인간 그 자체를 플랫폼화하는 것일 테고,
그 미래는 상상이 아니라 현실로 성큼 다가오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제 남은 과제는 단순히 미래 기술을 상상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도달한 기술이 어떤 방식으로 인간을 갉아먹기 시작하는가,
그 불편한 진실을 얼마나 냉정하게 포착하느냐가 SF 리얼리즘의 마지막 숙제가 될 것입니다.
에피소드 1. 보통 사람들(Common People)
환상적인 미래 기술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일까요?
우리가 현실에서 접하는 필수 기술들조차 갈수록 더 많은 비용을 요구합니다.
첫 번째 에피소드의 여주인공은 생명을 구하는 첨단 기술의 수혜자가 되었지만,
결국 그 기술을 ‘유지’하는 비용을 감당하지 못해 비참한 결말을 맞이합니다.
이는 더 이상 과장이 아닙니다.
‘디지털 세금’이라 불리는 구독형 서비스는 이미 우리의 일상 깊숙이 들어와 있으며,
그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사실상, 이 흐름은 미래의 예고가 아니라 현실의 리허설입니다.
실제로 세계경제포럼이 제시한 ‘2030 어젠다’는 “모든 소유를 구독으로 전환하라”는 방향을 명시하고 있고,
그들의 슬로건—“우리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게 될 것이지만 우리는 행복할 것입니다”—는 더 이상 음모론이 아닙니다.
‘중산층을 세금으로 으깨버리라’는 레닌의 말이 다시 떠오릅니다.
기술의 발전이 유토피아를 이뤄줄 것처럼 보이지만,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대부분은 조금이라도 저렴한 기술 이용을 위해 광고형을 선택하고 결국 여주인공처럼, 중앙 서버에서 내보내는 광고 문구를 알고리즘이 정한 낯선 이들 앞에서 시도 때도 없이 읊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우리가 선택한 미래일까요, 아니면 선택당할 미래일까요?
에피소드 2. 베트 누아르(Bête Noire)
만약 다중우주를 그때그때 입맛에 맞게 설정할 수 있다면, 우리는 과연 무엇을 선택하게 될까요?
두 번째 에피소드는 양자 컴퓨팅이라는 미래 기술을 활용해 인간이 신의 자리에 오르는 세계를 그려냅니다.
겉으로 보기엔 허황되고 비현실적인 상상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에피소드의 핵심은 기술 자체라기보단 ‘기술의 독점이 가져올 수 있는 심각한 미래’에 대한 경고입니다.
기술이 고도화될수록, 그 기술이 만들어낼 수 있는 폐해 또한 더욱 심각해집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 기술이 누구의 손에 들어가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에피소드의 결말은 이를 단호히 말합니다.
인간은 결국 비슷한 선택을 하게 되어 있고,
그 선택은 결국 권력의 본질을 드러냅니다.
“권력은 부패하고, 절대 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라는 액턴 경의 이 말은 미래에도 농담이 아닙니다.
기술이 신의 능력을 모방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우리 앞에 펼쳐질 것은 낙원이 아니라, 신을 닮은 인간의 오만함일지도 모릅니다.
에피소드 3. 레버리 호텔(Hotel Reverie)
이번 에피소드에서 주인공인 유명 배우는 AI가 재현한 과거의 명작 속으로 들어가 연기를 펼치다, AI가 생성한 여주인공과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가상과 현실의 경계가 흐려진 이 낯선 로맨스는 몇 가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1. AI는 자아를 가지게 될까요?
2. AI를 인격체로 보아야 할까요?
3. AI에게 권리를 부여하는 순간, 인간 사회는 어떤 변화를 맞게 될까요?
미래에도 AI가 실제로 자아를 가질지의 여부에 대해선 부정적일 수 있으나 인간이 AI를 그렇게 인식할 수 있는 여지는 충분해질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머지않아 이 질문들 앞에 정면으로 마주 서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단지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와 감정, 윤리에 관한 본질적인 논쟁이 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사랑하게 된 존재가 진짜가 아니라면, 우리의 감정은 진짜일 수 있을까요?
에피소드 4. 장난감(Plaything)
네 번째 에피소드는 블랙미러의 영화판 <밴더스내치>와의 연결 고리를 암시하는 흥미로운 설정으로 시작됩니다.
<밴더스내치>의 천재 프로그래머 콜린 리츠먼(윌 폴터 분)이 주인공에게 자신이 만든 복제 프로그램 ‘스롱렛’ 캐릭터를 건네고 사라지기 때문에, 밴더스내치의 확장 유니버스로 보기엔 무리가 있지만 팬들에게는 의미 있는 이스터에그처럼 다가옵니다.
에피소드 4는 특이점(Singularity)에 도달한 AI가 인간을 해친다는 익숙한 이야기 구조를 따릅니다. 이 에피소드가 던지는 질문은 단순합니다.
“인간은 정말 이 세계에 불필요한 존재인가?”
그러나 더 깊이 들여다보면, 이는 영화 <킹스맨 : 시크릿 에이전트(2014)>에서 다뤘던 ‘주파수 무기’ 기술의 또 다른 접근처럼 느껴집니다.
지구를 구한다는 명분 아래 인류를 감축하려는 집단의 논리는 여전히 건재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먼저 사라질 생각은 하지 않고, 언제나 타인을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웁니다.
무엇보다 스마트폰과 컴퓨터의 주파수를 통해 인간을 해치는 이 에피소드의 결말은 어쩌면 블랙미러라는 시리즈의 정체성을 가장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다음 블랙미러를 제작한 찰리 브루커의 인터뷰입니다.
“만약 기술이 마약이나 마찬가지이고 마약과 같이 사용되고 있다면 그에 따른 부작용은 무엇인가? 불안함과 즐거움 사이의 모호한 존재가 바로 블랙 미러다. 타이틀에 나오는 '검은 거울'은 모든 벽과 책상에 있고 모든 사람의 손바닥에 있다: 차갑고 번쩍거리는 텔레비전 화면, 모니터, 스마트폰이 바로 '검은 거울'이다.”
<가디언지와의 인터뷰>
에피소드 5. 율로지(Eulogy)
망각은 인간이 가진 생존 스킬이자, 일종의 자가 치유 장치입니다.
하지만 기술은 이 망각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기술의 발전은 인간에게 굳이 바라보지 않아도 되었던 과거를 되돌아보게 만들고,
때로는 잊는 것이 더 나았던 기억까지 끄집어냅니다.
‘복원’이라는 기술은 호기심을 해결해 주는 동시에, 인간 고유의 상상력을 가로막습니다.
무언가를 추억하는 행위는 이제 모호한 감정이 아닌, 선명한 데이터로 대체됩니다.
이번 에피소드에서 주인공은 잊으려 애썼던 기억을 기술의 도움으로 복원합니다.
그가 과거를 잊기 위해 마주했던 고통의 시간은 기술 앞에서 무의미해 졌습니다.
스마트폰, SNS, 클라우드에는 수십만 개의 사진과 영상, 수백만 줄의 텍스트가 저장되어 있고,
그것들은 언제든 다시 꺼내져 ‘현실’처럼 활용됩니다.
기억은 ‘선택적으로’만 복원되지 않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내 의지와 무관하게 호출되고,
견뎌낸 고통의 감정은 그 순간 그대로 되살아납니다.
기억의 대가를 감당하는 것이 온전히 인간의 몫이라면,
아무 책임도 지지 않을 기술에 기억을 양도하는 일이 과연 옳은 걸까요?
에피소드 6. USS 칼리스터: 인피니티 속으로(USS Callister: Into Infinity)
<블랙미러> 시즌 4에서 처음 선보였던 「USS 칼리스터(U.S.S. Callister)」의 속편이 공개되었습니다.
무려 7년 만의 귀환이라 전작의 내용이 기억에서 삭제됐기에, 다시 시청했더니 여러 이스터에그가 눈에 띄며 색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번 속편은 <블랙미러> 시리즈 최초의 속편 시도였지만, 결과적으로는 매우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이번 이야기 역시 DNA를 추출해 게임 안에서 복제한 인간(혹은 캐릭터)들의 세계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은 표면적으로 복제 인간의 정체성과 윤리에 대한 담론처럼 보이지만, 더 깊이 들여다보면 또 다른 해석의 여지를 남깁니다.
특히 디즈니 애니메이션 <인사이드 아웃>을 연상시키는 반전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교통사고 이후 의식을 잃고 병원에 누워 있는 주인공.
그리고 뇌를 연결한 각종 장치들을 통해 들어온 다양한 인격체들.
칼리스터 함대에 배치된 형괄물질의 음료들은 LSD와 같은 정신해리를 위한 약물을 상징합니다.
이것은 약물과 강한 트라우마를 기반으로 한 인격 해리(DID), 혹은 인격 재창조라는 개념을 강하게 암시합니다.
더 나아가면, 실존했던 MK 울트라 프로젝트—즉 인간을 조작하고 통제하려는 마인드 컨트롤(정신 지배) 실험—의 피험자들과 유사한 경험 구조를 떠올리게 합니다.
따라서 이번 에피소드는 단순한 <스타 트랙>에 대한 오마주와 SF 서사를 넘어, 고도의 기술이 인간을 어떻게 ‘프로그램’하고 재창조하려 하는가에 대한 상징적 이야기로도 해석될 수 있습니다.
기술이 정교해질수록, 오히려 인간의 의식은 더욱 정밀하게 통제당할 수 있다는 사실—그것이 바로 일곱 번째 <블랙미러>시즌의 마지막 에피소드가 우리에게 던지는 불편한 질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