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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무드북

[영화] ‘써클‘(2015)

이것이 진짜 랩배틀이다

by 스투키

장소의 이동이 전혀 없이 진행되는 영화는 간혹 있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한술 더 떠서 출연자들의 위치마저 고정시켜 버립니다. 거기에 출연자의 자의적인 이동마저도 없습니다.(죽으면 끌려나감)

그래서 영화 스틸컷조차도 몇 개 없습니다.

이런 초 저예산 영화가 주는 긴장감이 나름 쏠쏠할 때가 있습니다만, 영화 <써클>은 그 부분에서는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아무래도 죽음의 방식이 너무 깔끔한 탓일 수도 있습니다. 죽음이 기절의 느낌으로 다가오면 긴장감은 물 건너간 것입니다.

하지만 미스터리적인 재미는 남아 있었습니다. ‘누구?’와 ‘왜?’에 대한 호기심은 이 영화를 끝까지 끌고 가는 핵심 원동력입니다.


저의 예상은 <써클>이 UFO 납치설에 대한 호기심을 사화과학 실험으로 풀어낸 영화라는 것이었습니다.

인간 연구 측면으로 본다면, 외계인이라고 해 봤자 지적인 탐구 영역과 수준이 지구의 대학 논문 수준에 머물 것이라는 발상에서 비롯됐을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영화의 앤딩은, 그런 저의 예상을 여지없이 무너트리고 말았습니다.


작은 원을 벗어나면 죽는다는 설정 때문에 몸싸움 없이 진행되는 이 생존 언쟁 서사는 진정한 랩 배틀이라 할 수 있었습니다.

어떤 갱스터 래퍼도 이 대회에 참여하기를 꺼릴 것입니다.


이후 감상은 먼저 줄거리를 소개하고 계속 이어나가겠습니다.




* 이후에는 스포가 담겨있습니다.

줄거리

알 수 없는 이유로 사람들이 납치됩니다.

그들은 전부 지구 어딘가에서 잠이 들었다가 자신의 영역을 표시한 듯 한 작은 원 안에 선채로 깨어납니다.

​50명의 인원이 채워지자 딜레이 없이 바로 규칙을 알 수 없는 데스매치가 시작됩니다.

원을 벗어나면 죽는다는 룰은 비교적 빠르고 쉽게 알아낼 수 있었습니다.

이어서 인간의 합리적 추론과 논리적 사고 능력은 간단한 테스트를 통해 투표가 2분 간격으로 계속 이어지며, 투표에서 가장 많은 득표자가 죽는다는 추가적인 룰을 간파해 냅니다.

하지만, 룰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 원을 벗어나 죽음을 택하는 사람을 제외하곤 2분마다 최소 한 명 이상씩 중앙에서 분사되는 라이트닝을 맞고 심정지로 죽어 나갑니다.

자신에게 투표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는 룰까지 간파한 생존자들은 최후의 한 명은 살 것이라는 희망?으로 과연 누구를 살릴 것인가에 관해 토론하기 시작합니다.

그로 인해 그들은 이 같은 상황을 ‘인간 사회에서는 어떤 사람의 생명에 가장 가치를 두는가를 알아보기 위한 외계인의 사회과학 실험’으로 추측합니다.


득표수가 같을 때는 일단 동점자를 표시해 주고 상황에 따라 처리합니다.

70대 이상의 고령자를 먼저 죽이는데 동의하는 것까지는 어렵지 않게 진행됩니다.

하지만 그 후부터는 모두가 몇 분이라도 더 살아보기 위해 인종, 성별, 나이, 성 정체성, 자녀 유무, 기부액 등 모든 기준의 차별을 시도해, 자신이 그 우위에 서 있음을 살아야 할 근거로 내세우며, 오직 생존 본능만이 남은 일대 접전이 펼쳐집니다.​

우여곡절 끝에 그래도 가장 어린 두 아이(한 명은 태아)를 최후까지 남겨두기로 한 합의에 가까워지면서, 인류의 도덕이 가리키는 생명의 가치는 그 존재 시간과 반비례한다는 결론에 다다르는 듯이 보였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반전은 외계인이 사실 아무 실험도 하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영화가 외계인의 사회과학 실험을 가장해 보여주고자 했던 것은 다양한 인간 군상과 인간 내면에 감춘 추악한 본성 따위나 상대적 윤리의식 같은 인문학적인 요소가 아니었습니다.​


냉혹한 적자생존의 원리뿐이었습니다.​

가치 있는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은 자가 가치가 있는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어쩌면 외계인들은 그저 인간을 멸종시키는 재미로, 데스매치 게임을 통한 리얼 서바이벌이나 로또 같은 프로그램을 자신의 종족에게 방영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공중에 떠다니는 비행 물체의 수준만 봐도 지구보다 수백 년 앞선 종족이, 인간이라는 하등 한 종을 이해해야 할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는 게 사고의 오류였습니다.


그들이 선정한 실험군은 하늘에 떠있는 수많은 UFO 한대당 남녀노소, 빈부귀천 외에 성 정체성 등 다양성 비율을 적당히 맞춘 50명입니다.

그것으로 봐서 무작위 선정은 아니고, 치밀하게 계산된 인원 구성임을 알 수 있습니다.

따로 신상조회 절차를 거치는 일이 없었음이 분명한데도, 이런 다양한 분포의 구성이 순식간에 가능한 것은, 이미 납치 전에 순간적으로 모든 식별이 가능한 초정밀 인간 분류 알고리즘이 구축되어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영화의 앤딩으로 봐서 이번 최후의 생존자는 아마도 다음 토너먼트에 출전해야 할 것입니다. 이는 수십억 인류의 최후 한명이 남을때까지 계속 될 수 있습니다.


악(惡)도 없고 선(善)도 없으며, 그저 보이지 않는 잔혹한 냉담함 만이 존재한다.
<리차드 도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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