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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성우 Feb 03. 2023

기억의 조건

-반년동안의 유럽살이를 마무리하며

 약속이 깨졌다. 반년동안의 유럽살이를 꾸준히 글로 남기자던 스스로와의 약속이 깨졌다.

향수병이 낫거든 글을 쓰자, 이번 여행만 끝내고 글을 쓰자, 조금 더 적응하고 나서 글을 쓰자... 갖가지 핑계로 차일피일 뒷전으로 밀린 글쓰기는 그렇게 나의 손을 타지 않고 방치되어 버렸다.

 

 방치된 글쓰기를 다시 시작하려 여러 번 시도하기는 했다. 책상 위에 흰 종이를 놓고 억지로 의자에 붙잡아둔 엉덩이를 여러 번 들썩여보아도 도무지 글은 써지지 않았다. 글쓰기는커녕 글 읽기의 리듬조차 잃어버려서 챙겨간 책을 이리저리 뒤적여보아도, 보이는 건 활자요 남는 것은 지끈거림이었다. 마음은 이미 람블라스 거리에, 사그라다파밀리아 대성당에 가 있었으니 고리타분한 활자가 소란한 마음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그렇게 몇 번의 시도와 실패 끝에 나는 체념했다. 당분간 글쓰기는 잊어버리고 이 들뜬 마음을 계속 즐겨보자고. 작열하는 지중해의 태양을, 해풍에 나부끼는 야자수잎의 떨림을, 거리마다 스민 자유와 낭만의 정취를, 해가 숨은 뒤에야 비로소 느긋느긋 하루를 시작하는 스페인 사람들의 여유를 온몸으로 누려보자고.


 물론 작가로서의 양심은 희박하게나마 남아있었는지 그 들뜬 순간순간을 활자로 기록하기는 했다. 다만 그 기록은 한 편의 글에서 문단으로, 문단에서 문장으로, 문장에서 단어로 한없이 짧아져갔지만 말이다.


 그렇게 글에서 벗어난 채 현지와 현재가 주는 충만한 기쁨으로 6개월을 가득 채웠다. 뜨겁고 열정적이었던 여름과 오감을 넉넉히 채워준 가을을 지나, 온화하되 분주했던 겨울을 견디고 보니 어느새 서울로 되돌아올 날이 임박해 있었다. 여태껏 삶에서 겪어본 적 없던 속도감을 통과했다.


 한국으로 돌아오고, 새로이 생겨난 아쉬움과 그리움이 들뜬 마음을 얼마간 희석하자 비로소 글쓰기가 손에 잡혔다. 지나고 나서야 똑바로 보이는 마음이 있다는 것, 들뜬 마음이 가라앉아야 생각나는 시간이 있다는 것. 이 사실은 내가 다시금 시간을 더듬으며 추억을 글로 풀어낼 이유가 되어주었다.


 내 고향 서울에 대한 그리움으로 시작했던 타향에서의 6개월이, 평생의 그리움이 될 6개월로 변해오는 과정을 비로소 기록할 수 있게 되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토막 난 기록들을 차분히 이어 붙이며 글을 써야겠다. 지구 반대편에서도 나의 곁을 채워준 소중한 사람들에 대하여. 벅찬 추억으로 나를 포근히 감싸준 따뜻했던 장소들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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