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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성우 Mar 28. 2021

어쩌다 선배

 겨우내 꽁꽁 얼어있던 땅은 어느새 아지랑이를 뿜어내고 군데군데 초록의 새싹을 움틔운다. 계절은 벌써 봄의 무대다. 약동하는 봄날의 볕을 잔뜩 머금은 3월의 캠퍼스는 막연한 기대감으로 충만하다. 캠퍼스에 들이친 봄기운에 봄날의 아기곰처럼 기분이 좋아진 나는, 볕이 잘 드는 나무벤치에 걸터앉아 동기 녀석과 반가운 대화를 나눈다. 지난겨울 그와 내가 부지런히 지나온 각자의 사랑에 대해, 방학 동안 그가 다녀온 여행지에 대해, 내가 여행에서 보고 겪은 수많은 사람들과 장소들에 대해, 우리가 이따금 만나 술잔을 기울이며 지새웠던 추운 겨울밤들에 대해.


 대화가 봄볕에 그을려 점차 무르익고, 나란히 앉은 우리들이 어쩌면 지난겨울보다 조금 더 멋진 어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착각에 빠질 때쯤, 신입생 몇몇이 저 밑에서 이 편 언덕으로 올라오는 모습이 보인다.
캠퍼스의 경사가 얼마나 요란한지 미처 몰랐을 가엾은 여자 새내기는 높은 하이힐을 신고 낑낑대며 언덕을 오른다. 아직 화장이 익숙지 않은지 허옇게 뜬 얼굴을 연신 구기며 걷는다. 이에 질세라 길들지 않은 워커와 롱코트로 잔뜩 멋을 낸 남자 새내기는 아직 빠지지 않은 파마약 냄새를 풍기며 연신 언덕을 오른다. 그들의 풋풋한 등반을 지켜보며 동기 녀석과 나는 우리가 어느덧 선배가 되었음을 실감한다.

마찬가지로 채 길들지 않은 구두를 신고 연신 캠퍼스의 언덕을 오르던 몇 해 전의 나, 짧으면 짧다고도 길면 길다고도 할 수 있을 지난 대학생활에서 나는 얼마나 자랐을까.


 남들보다 조금 늦은 나이에 대학에 들어온 탓인지 나는 대학에 대한 막연한 환상을 품고 새내기 생활을 시작했다. 그토록 바라던 대학생활에 걸맞게, 학기가 시작되면 마음이 잘 통하는 동기들 그리고 선배들과 허허실실 웃는 일들만 가득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대학에서의 첫 학기는 나의 이러한 환상을 무참히도 깨버렸다. 친근함의 기술이 미숙한 탓인지 서로 잘 알기도 전에 너무나도 많은 것을 털어놓는 사람들과 그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어울리기 위해 마찬가지의 무례함을 내비치게 되는 나. 사람을 만나고 사람과 친해지는 일이 경쟁처럼 되어버린 혼란스러운 대학사회, 아주 풋풋한 나이인 스무 살의 언저리에 벌써부터 더 좋은 평판을 갖기 위하여 서로 악의적인 행동을 주고받는 모습들. 학생 사회에 깊이 다가갈수록 그 모습들에 진절머리가 났고, 학생 사회를 지키고 있는 사람들보다 학생 사회를 떠나는 사람들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한 학기가 채 지나기 전에 대학생활에 지친 나는, 학교에 가는 일이 점차 싫어졌다.


 P형을 만난 건 그때였다. 군대를 막 제대하고 대학에 복학한 세 학년 선배, P형과의 조우는 나의 대학생활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았다. 그날은 한 선배와의 식사자리를 갖게 된 날이다. 미처 거절하지 못한 그 자리에 부랴부랴 가고 있던 중, 그 선배로부터 연락이 왔다. "우리 과에 P선배가 복학했는데, 내 친구 B랑 오늘 식사 약속이 있다네, 다 같이 친해지면 좋으니까 같이 먹자고 했어! 괜찮지?" 아뿔싸! 그저 간단히 밥을 먹고, 황급히 집으로 가려 한 나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순간이었다. '그래.. 인사치레로 몇 잔 받다가 집에 가자, 그 뒤 동네로 고등학교 동창들을 불러내서 편하게 마시자' 속으로 생각하며 불편한 마음을 무겁게 든 채 그 자리에 갔다.


 자리는 예상과는 달리 화기애애했다. 술을 진탕 마신 '주선자' 선배 둘은 이미 취해 제정신이 아니었다. P형과의 깊은 대화가 시작된 건 그때였다. 나는 취기를 빌려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내 마음속에 있는 말들을 다 털어냈다. 왠지 P형에게는 그래도 될 것 같았다. N수를 하면서까지 어렵게 온 대학생활이 예상과는 너무나도 다르다고. 이 얕고 피상적인 관계의 틈에서 어디에 정을 붙여야 할지 모르겠다고. 나는 말하고 P형은 들어주었다. 나는 서러웠고, P형은 나를 다독여주었다. P형은 자신의 새내기 생활도 그때의 나와 같았다고 말해주었다. 자기도 사람에게 상처를 받을수록 점점 더 마음의 문을 닫고 소수의 몇 명과만 친해지게 되었다고 말해주었다. 너는 틀린 게 아니라고, 너는 나와 참 많이 닮았다고, 네가 틀렸다면 나도 틀린 게 되니까 적어도 너 혼자만 틀린 것은 아니라고, 그럼에도 너의 열린 마음을 조금 더 지켜나가라고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너의 진가를 알아보고, 스스로의 진가를 내비치는 사람들이 분명히 네 곁에 올 거라고...

그날의 술자리가 어떻게 끝이 났는지 아직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내가 대학에 들어가 처음으로 마음껏 취할 수 있던 밤이었다는 사실이다.


 그 뒤로 P형을 졸졸 쫓아다니는 나의 대학 생활이 시작됐다. P형은 형 말대로 '진가'가 보이는 따뜻한 사람들 곁에 나를 데려갔다. P형 덕에 대학 사람들에 대한 나의 경계심이 점차 낮아지는 나날이었다.

P형은 형이 많이 아낀다는 H형에게로 나를 데려갔다. P형보다 한 살 어린 H형도 나와 같은 고민을 했던 사람이라고 내게 소개했다. 그와 함께 몇 잔의 소주를 비우며 나는 생각했다. H형에게는 나와 닮은 구석도, 내가 닮고 싶은 구석도 참 많다고. 그는 내가 했던 고민들을 먼저 겪었고 그 때문에 여러 번 휘청인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나와는 달리 계속해서 사람들 앞으로 나아간 사람이었다. 사람들에게 상처를 받는 것이 마찬가지로 힘들고 두려워도 '관계'를 회피하지 않고 그 상처를 굳은살로 만들 줄 아는 사람이었다. 내게는 없던 대담한 근성이었다. 졸졸 쫓아다닐 사람이 한 명 더 늘어난 순간이었다.

그날 이후 몇 번의 술자리에서 몇 짝의 소주를 함께 비우며 내 마음에 있던 생채기들은 형들의 따뜻함으로 채워졌다. 그 덕에 어느새 제 모양을 회복한 내 마음에서는 다시 사람을 향해 손 내밀 용기가 생겨났다.


 P형과 H형은 내가 대학에서 처음으로 본 '선배다운 선배'들이다. 본인들이 겪었던 어떤 종류의 아픔이나 괴로움(주로 인간관계에서 비롯된)도 후배가 겪지 않도록 몸소 커다란 울타리가 되어주는 사람들이다. 후배가 곤경에 처하면 든든한 방패가 되어주고, 혹여라도 지친 기색이 보이면 언제고 나타나 마음을 다독여주는 따뜻한 선배들이다. 선배라는 지위는 그저 시간이 부여해준 것이라며 혹여라도 본인들의 행동이 후배에게 부담이 되지는 않을지 늘 경계하면서도, 궂은일이 생기면 이런 건 선배가 해결하는 것이라며 '책임감에서 비롯된 위악'을 부린다. 이렇게 따뜻한 그이들은 '선배'라는 존재에 대한 존경과 애틋함을 처음 느끼게 해 준 고마운 사람들이다. 나아가 형들과의 만남은 더 많은 선배들에게 먼저 다가가 손 내밀 수 있게 해 준, 그리하여 많은 소중한 이들을 새로 얻을 수 있게 된 일종의 계기였다.   


 새내기 시절에는 미처 길들지 않았던 구두가 내 발에 꼭 맞는 모양이 되었을 무렵, 내가 '형', '누나', '선배'라고 부르던 이들은 하나 둘 캠퍼스를 떠나가고, 도리어 내가 '형', '오빠', '선배'라고 불리는 일들이 늘어났다. 이렇게 후배들에게 '선배'라고 불릴 때면 나의 소중한 형들을 생각한다. '선배'라는 말의 무거움을 생각한다.

어쩌다 선배가 된 나에게 한 가지 소박한 목표가 있다면, 나 또한 후배들에게 '선배다운 선배'가 되어주고 싶다는 것이다. 후배들에게 진심에서 비롯된 따뜻한 말을 건네고, 언제고 다가와 지친 마음을 비빌 얕은 언덕이 되어주고 싶다. 사람에게 받은 상처를 치유해주고 또다시 사람 곁으로 다가갈 수 있는 용기를 건네주고 싶다. 내가 겪은 괴로움과 서러움을 그들은 겪지 않도록 그들에게 지혜로운 길잡이가 되어주고 싶다. 많이도 미숙할 그들이 그래서 스스로 많이도 작아질 그들이,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을 느끼도록 귀하게 대해주고 싶다. 그들이 자신감을 가지고 새로운 환경에 익숙해질 때까지 묵묵히 곁을 지켜줄 줄 아는 따뜻한 사람이 되어주고 싶다. 어쩌면 그것이 내가 형들에게 받은 사랑을 갚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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