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도의 회상록-8
"형. 집 나가게 되면 멀리 가지 말고 적당히 돌아와."
"형 나가면 엄마가 욕조에 뜨거운 물을 받는단 말이야."
"어서 나와 밥 먹어야지."
너 자신을 알라. (원어: γνῶθι σεαυτόν)
하지만 이 문장은 이제 소크라테스를 만나 다르게 해석됩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찾아간 현명하다고 자처한 이들의 사례를 기반으로 '자기 자신의 무지를 인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진리'라고 깨닫습니다. 해당 문구는 다음 내용을 전제로 합니다. 첫째, 인간이라면 스스로 질문할 수 있음을 기반합니다. 무엇을 알기 위해서는 질문하고 답하는 사고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그렇기에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은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 질문하고 답할 수 있는 존재'임을 전제로 합니다. 생각해 보면 자신의 과거를 반성하고 뉘우치는 행위도 '자기 자신에게 질문하고 답할 수 있는 능력'이 인간에게 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성찰과 같은 행위가 불가하다면 인간은 결코 자기 자신을 알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정체성을 가지고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며, 반성과 고백의 행위를 하기도 합니다.
둘째, 인간은 '지'와 '무지'를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점을 전제로 합니다. 동양에서도 맹자는 인간에게 선천적으로 주어진 사단을 설명합니다. 사단은 네 가지 씨앗을 말하는데 그중 '옳고 그름을 가르는 시비지심'이 있습니다. 이는 참과 거짓을 구별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만약 인간이 참과 거짓을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면,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은 무의미할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알더라도 그 앎이 옳은지 그른지 판단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한 '앎'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셋째, 자기 자신을 아는 앎이 곧 진리라는 점입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자기 양심의 심판에 세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자시을 투명하게 대하는 것은 아닙니다. 때때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스스로 '기만', '합리화', '허세', '허영', '회피' 등을 하기도 합니다. 이는 자기 자신에 대한 올바른 앎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소크라테스는 자기 자신에 대한 앎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진리는 신적 세계에 있는 절대적인 앎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한 앎에서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