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은 어렸을 적 어떤 장난감을 가지고 놀으셨습니까? 남자 아이들의 경우에는 로보트가 합체하고 변신하는 전대물 프라모델이 있을 수 있고, 여자 아이들의 경우에는 귀엽고 앙증맞은 인형과 어여쁜 인형옷이 있을 것입니다. 저는 남동생이 있는데, 저희는 유독 레고를 많이 좋아했었습니다. 제가 동생과 같이 가지고 놀았던 레고에 대한 추억과 그에 대한 사유를 여러분과 나누고자 합니다.
2. 레고의 추억
저와 동생은 주로 레고를 가지고 놀았습니다. 부모님께서 어린이날이나 성탄절에 사주시던 양손 손바닥 만치 작은 아이들에서 시작했습니다. 주로 레고를 가지고 놀 때는 처음에 디자인되었던 그 모형 그대로 가지고 놀았었습니다. 하지만 점점 성장하고 가지고 있는 블록들이 많아지면서, 정해져 있던 디자인에서 벗어나 조금씩 자신의 기호대로 수정해서 가지고 놀았습니다. 하얀 눈썰매였던 장난감은 검은색과 빨간색이 들어간 썰매로 바뀌었습니다. 동생의 경우에는 가장 작은 한칸짜리 납작한 동그란 블록을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동생은 종종 납작한 블록을 중간에 끼워서 자신의 장난감을 꾸미곤 했습니다. 저의 경우에는 가장 윗 칸에 있는 볼록한 부분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위에 끼우기 위한 홈이 없는 매끈한 사각형 타일을 붙이곤 했습니다.
남자 형재인 저희는 주로 탈것을 좋아했습니다.
시간이 더 지나 저희가 가지고 있는 레고 블록은 더 이상 장난감 상자에 보관하기 어려워졌습니다. 그래서 부모님은 레고 블록들을 모아서 정리할 수 있는 커다란 보자기를 사주셨습니다. 그 보자기는 원형 테두리에 조임 끈이 있어서 레고를 가지고 놀면 그 안에 넣고 한 번에 담을 수 있는 형태였습니다. 하지만 만들어 놓은 모형을 보자기에 넣어 놓을 경우 그 안에서 섞이고 해체되기 일수였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각자 애정하는 모형만 밖에 보관하고 사용하지 않은 블록들은 주머니 안에 보관하였습니다. 그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보자기 안에는 조각 조각 해체된 작은 블록들이 담기게 되었습니다. 이후 저희는 기존의 디자인을 분해해서 각자 자신이 만들고 싶은 것을 자유롭게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기존의 틀을 해체함으로써 새로운 창조가 시작된 것입니다. 저와 동생은 각자 더 새로운 모형을 만들려고 시도하였고, 어느덧 누가 더 멋있고 신기한 모형을 만드는지 경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마 많은 이들이 여기에서 선의의 경쟁을 하며 놀았을 것을 기대하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희 형제는 새로움의 극단을 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의 몸통과 다리를 분해했고, 특히 다리 부분을 새로운 쓰임으로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다리 부분은 양 쪽의 다리가 앞과 뒤로 90도 회전이 가능했고, 발바닦과 엉덩이에 다른 블록을 끼울 수 있는 형태였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다리를 모아 괴상 망측한 지네를 만드는 가 하면, 멋진 우주선 모형에 사람의 다리만 달아서 마치 우주선의 함포처럼 보이게 하기도 했습니다. 사람의 머리는 단독으로 사용하면서 '얼굴만 있는 몬스터'로 통통 튀어 다니면서 가지고 놀았습니다. 기존의 쓰임에 맞지 않게 사용하는 형태는 저희에게 매우 신선한 소재였고, 그 형태는 다소 그로테스크하게 변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새로움은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사람의 몸통부분은 그 형태가 사람의 것을 가지고 있어서 다른 용도로 사용하는데 이질감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희는 새로움을 찾지 못한 갈망에 방황하던 시기를 보냈습니다. 레고에 흥미를 잃은 저희를 보다 부모님께서는 인근 백화점에서 하는 레고 조립 대회에 가보자고 하셨습니다. 저와 동생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새로운 쓰임의 방식, 즉 인간 다리 블록을 이용한 참신하면서 괴기스러운 설계도를 머리에 그려서 대화에 나갔습니다. 대회는 무작위로 꾸려진 사람들과 한정된 블록으로 특정 주제의 모형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저와 동생은 나이가 어린 관계로 2인 1조가 되었는데, 저희는 너무나 당혹스러워 제대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떨어졌습니다. 주어진 블록에 사람이 없었던 것입니다. 저와 동생은 남들이 쓰고 남은 블록을 모아서 기다란 비행기 모형을 만들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하지만 저희는 그 대회에서 오히려 새로운 갈망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대회에서 우승한 사람들 중에 저희와 같은 또래의 아이가 있었는데, 그 아이는 집을 지어서 제출했었습니다. 남들에게는 당연해 보이는 결과물일 수 있습니다. 레고라는 장난감이 애초에 건물을 디자인해서 같이 판매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와 동생은 주로 우주선이나 비행기, 전차 등을 만들었고, 이 장난감을 카페트와 침대이불에서 가지고 놀았었습니다. 남자 아이들이어서 그런지 저희에게 있어 거주할 공간은 불필요했습니다. 늘 탈것을 가지고 놀면서 이곳 저곳으로 모험을 떠나는 놀이를 했기 때문입니다. 저희는 대회에서 떨어진 이후, 건축에 심혈을 기울이기 시작했습니다. 저희가 가지고 있는 블록의 종류와 길이 그리고 바닦이 되는 판의 넓이를 고려하여, 다양한 모형의 집을 지으려고 했습니다. 물론 집 안에는 테이블과 의자, 그럴 듯한 책장과 벽걸이, 조명기구 등 다양하게 체웠습니다.
요즘은 창의적으로 가지고 노는 아이들을 위해 각 블록들을 개별적으로 담아서 판매합니다.
이때부터 동생과 저는 레고 블록으로 인해 서로 눈치를 보고 싸우기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블록은 한정적이고, 내가 설계한 모형을 만들려면 다른 사람이 가져가기 전에 내가 쟁취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저의 동생은 꽤나 순박한 편이었지만, 또 레고로 건설을 할 때 만큼은 양보하는 경우가 없었습니다. 저희는 양손을 뒤적이며 경쟁하듯이 레고 블록을 뒤졌습니다. 저희의 싸움을 본 부모님은 싸우지 말라고 디자인 없이 개별 블록만 판매하는 제품을 사주셨습니다. 해당 제품은 저희에게 놀라운 새로움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기존에 사용하던 레고 블록은 이미 디자인된 모형을 해체한 것이기 때문에 종류가 한정적이고 없는 색상과 모형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개별 블록만 있는 제품은 형연색색의 블록이 낱개로 여러개가 들어있었습니다. 이를 이용해서 저희는 더욱 다양한 집을 지었고, 어느덧 시청하던 만화영화의 기지를 따라서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저희는 나름 레고에 대한 투철한 도전정신과 실험 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른 장난감은 아니더라도 레고에 있어서만큼은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저희는 명절에 할아버지 댁에 가고는 했는데, 친척이 새로 이사를 해서 그 집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친척의 집은 주택이었고 그 집에는 사촌 형과 누나가 살고 있었습니다. 누나는 자신도 레고를 잘 가지고 논다고 말하면서, 자신이 만든 레고 모형을 보여주겠다고 하였습니다. 레고에 자신이 있었던 저와 동생은 누나의 실력을 검증하기 위해 보여달라고 거만을 떨었었습니다. 그런데 저와 동생은 누나가 만든 집을 보고 놀라서 한참을 바라봤었습니다. 누나가 만든 집은 지붕으로 천장이 막혀 있었으며, 마치 바위 위에 지어진 것처럼 방마다 층고가 달랐습니다. 저와 동생은 지붕까지 지어진 멋진 별장과 같은 집을 보고 놀랐고, 어떻게 가지고 놀 수 있냐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누나는 마치 인형의 집 장난감처럼 집의 뒷벽을 통채로 열어 보였습니다.
사촌 누나는 집 모형을 좋아했습니다.
이 일이 있고 나서 동생과 저는 한동안 충격에서 해어나올 수 없었습니다. 우선 레고의 건축에 있어서 충분히 수련하였다고 자부하고 있었던 자존심에 큰 상처가 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두번째로 여자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인형의 집 형태가 충격적이었습니다. 블록과 블록 사이에 이음새를 만들어서 벽을 열수 있는 구조물은 저희도 곧잘 만들곤 했습니다. 하지만 집의 한쪽 벽을 통채로 열수 있게는 만들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저와 동생은 누나와 우리의 차이가 바로 남자아이들과 여자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장난감의 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와 동생은 주로 자신을 상징하는 레고 사람을 정해놓고, 이들이 타고 조종할 수 있는 탈것에 치중해 있었습니다. 하지만 누나의 경우에는 마치 인형의 집에서 인형놀이를 하는 것처럼 레고를 건축해서 가지고 놀고 있었습니다. 이때 저희는 남자와 여자 간에 사유의 차이가 있다는 점을 발견했습니다.
또한 저희에게 있어서 큰 충격은 바로 '지붕'이었습니다. 저와 동생은 늘 아파트에서만 거주했습니다. 여러번 이사를 다녔으나, 저희는 한번도 주택에 살아본 경험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와 동생이 만든 건축물들은 모두 단층이었으며, 모든 방은 평평한 평지에 건축하였습니다. 또한 항공뷰를 보는 것처럼 지붕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부모님을 따라 모델하우스에 가서 보았던 설계도면처럼 저희는 위가 뚤린 지붕없는 집들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저희는 이러한 설계의 차이가 삶의 다름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아파트에서 사는 것이 당연했던 저희는 아파트에 지붕이 없는 것처럼 지붕이 없는 집을 지었고, 늘 주택에서 살았던 누나는 당연히 지붕까지 멋들어지게 꾸며서 만들었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저희는 부모님께 새로운 디자인이 있는 블록을 사달라고 졸랐습니다. 저와 동생의 사고에서는 새로움이 나오기 어려움으로 신재품의 도안을 보고 그 새로움을 찾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후 저희는 다시 새로운 마음으로 레고 회사에서 디자인한 모형을 그대로 만들고는 했습니다. 계속된 새로움을 찾다가 이제는 레고 회사가 제시하는 디자인에 굴복하여, 창의적인 자신만의 건축에 싫증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후 부모님께서 집에 컴퓨터를 놓으시면서 저희의 관심은 레고에서 점차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3. 레고와 하이데거
이후 레고를 다시 찾게 된 계기는 아주 우연하게 찾아왔습니다. 생뚱맞게도 대학교 철학 수업을 들으면서 어렸을 때, 레고를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해당 철학 과목은 현대철학자 하이데거의 사상을 배우고 있었습니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인간은 세계를 향해 눈과 손을 뻗는 개방된 존재입니다. 이는 사뭇 어렵게 받아들여질 수 있으나, 오히려 당연한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를 들면 망치와 못을 사와서 망치로 벽에 못을 박고 그 못 위에 그림을 걸어 놓았습니다. 이때, 망치와 못과 그림은 그것 각자가 어떤 쓰임과 용도를 지니지 않고, 인간의 의도에 따라 사용되고 배치됩니다. 이처럼 인간 주체는 도처에 있는 사물을 손으로 집어서 도구로 사용합니다. 그리고 인간은 사물을 자신의 생활 반경에 배치함으로써 그 사물의 쓰임을 결정합니다. 이때 망치와 못 그리고 액자, 더 나아가 방안에 책상과 의자 식기 등은 모두 인간의 의도에 의해 쓰임이 방향짖어지고 각자 배치를 당하는 존재입니다. 하이데거는 다른 사물을 방향짓는 인간을 '지금 여기 있음'을 뜻하는 현존재(現存在 , Dasein)라고 부르며, 이와 구별하여 인간에 의해 방향지음 당하는 대상을 '도구적 존재자'라고 합니다.
이때 각각의 도구적 존재자들과 현존재의 관계를 보면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닙니다. 도구적 존재자들은 현존재의 사용에 따라 각자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망치는 못을 박기 위하여, 못은 액자를 걸기 위하여 각각의 사용사태를 지닙니다. 이러한 연관은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고 있는 모든 도구적 존재자들에게 묶여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연결점을 타고 올라가다 보면, 다른 존재자를 위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위하는 존재자에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존재자는 자신의 존재를 위해서 다른 도구적 존재자를 사용하는 존재, 즉 현존재입니다. 단지 있기만 하는 도구적 존재자와 달리 현존재는 다른 존재를 방향짓고 배치하는 주도적인 개방성을 보입니다. 반대로 도구적 존재자는 다른 존재자를 위해서 자신이 사용 가능의 상태를 지닙니다. 이렇게 현존재는 세계 안의 도구적존재자가 지니는 연관성과 그 구조를 인지하고 있습니다. 이는 세계 속의 작은 세계가 되어 외부와 내부를 구별합니다. 마치 생활세계와 외부세계를 구별하는 것 처럼 말입니다. 하이데거는 이를 세계와 구별된 세계성이라고 표현합니다.
현존재는 자신만의 세계상을 구축합니다.
이러한 하이데거의 '현존재'와 '도구적 존재자'의 관계는 어린이들이 레고를 가지고 노는 놀이에 빗낼 수 있습니다. 처음에 저와 동생은 레고사에서 제공하는 설계도를 보고 그대로 따라서 만들어 놀았습니다. 이러한 놀이는 '다른 사람이 각각의 블록을 방향지은 바' 그대로 따라서 만드는 행위입니다. 남이 만들어 놓은 설계도를 그대로 따라서 만든다면, 그 모형을 만드는 나는 각각의 블록에 주도적으로 방향지음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도구적 존재자를 배치한 현존재라고 볼 수 없습니다. 레고 블록 하나 하나를 도구적 존재자로 본다면, 현존재의 모습은 자신의 의도에 따라 레고 블록을 스스로 선택해서 배치해야 할 것입니다.
대상의 방향짓기는 일종의 놀이가 될 수 있습니다.
하이데거는 현존재의 모습이 인간의 본래 모습이라고 설명합니다. 그의 설명과 같이 저와 동생은 레고사에서 제공하는 설계도를 그대로 따라서 만들지 않고 각자 변형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변형의 시도는 더욱 과감해져서 '인간의 다리'로 규정되어 있는 블록에 다른 쓰임을 부가하게 됩니다. 더 나아가 집을 건축하고 각각의 공간을 나의 의지대로 꾸미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저와 동생은 디자인이 설계된 레고 블록이 아니라, 개별적인 블록이 각각들어있는 상품을 원하게 됩니다. 이러한 제품은 다른 사람에 의해 방향지음이 아직 없는 레고 블록이기 때문에 저와 동생이 마치 현존재가 도구적 존재자를 배치하듯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와 동생은 각각 한정된 세계상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아파트'라는 공간구조에 있었습니다. 저희는 한번도 주택에 거주한 적이 없기 때문에 방마다 다른 층고를 생각해보지 못했고, 지붕을 만들 생각도 하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이유는 저와 동생이 의도를 가지고 도구적 존재자를 배치하는 현존재의 모습을 추구했다고 해도, 경험의 한계와 사고의 한계로 인해 제한된 세계상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제한된 세계상은 저와 동생이 레고블록 대회에 나갔을 때, 그리고 사촌 누나의 레고 모형을 보았을 때 확장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후에는 레고사의 신제품을 답습하면서 저희가 가지고 있는 한계점을 극복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이가 들고 시대가 변하면서, 이러한 '현존재-도구적 존재자'의 관계 놀이에 대한 유희는 레고에서 컴퓨터로 이동하였습니다. 당시 윈도우즈 배경화면에 있는 아이콘과 폴더, 그리고 각종 파일들은 사용자에 의해 마음대로 사용하고 배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4. 나가며
'주변 세계를 구축하고자 하는 놀이'는 비단 레고 블록에 한정되지 않습니다. 우리 주위에 많은 샌드박스 게임들도 유사한 재미를 제공합니다. 예를 들어 '롤러코스터 타이쿤'은 놀이동산을 운영하는 재미에 더하여, '자신만의 놀이동산'을 건설하는 재미를 제공합니다. 그리고 '심즈'는 자신의 옷과 가구, 가족, 집, 반려 동물 등을 자유로이 배치할 수 있습니다. 또한 '문명'과 '심시티'와 같은 게임은 보다 넓은 관점에서 도시와 국가를 자신의 의도대로 배치할 수 있습니다.
현실에서 실현 불가능한 '도시 만들기'는 가상현실의 놀이가 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구약성경의 창세기에 아담이 다른 존재자에게 하는 것처럼 '다른 존재를 명명하고 사용하고 배치'하는 행위를 본능적으로 타고 났을 수도 있습니다. 어린 아이들이 이를 자연스러운 놀이로 받아들이는 것 처럼 말입니다. 집에서 학교에서 아이들은 부모님과 선생님께 교육과 훈육을 받습니다. 이러한 경우 주변 사람의 생각과 결정, 그리고 의미와 가치를 주입적으로 답습하게 됩니다. 이러한 상태는 하이데거가 말하는 현존재의 모습으로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스스로 판단하고 행위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사고에 의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어린 아이들은 현실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싶어하는지도 모릅니다. 마음껏 장난치고 갖은 모험과 즐거움이 있는 나만의 세계를 누비며,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현존재의 자세를 발휘하려고 말입니다.
요즘 삶이 많이 어렵습니다. 세상 일이 뜻대로 되지 않고, 늘 예상하지 못했던 변수가 발생하기 마련입니다. 그럴 때마다 마음 한편에 '내가 세상을 조작할 수 있더라면'하는 바람이 피어 오릅니다. 이러한 바람의 기저에는 삶의 행복을 향한 열망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렸을 적 레고 블록을 가지고 놀면서 세상을 구축한 것처럼, 어른이 된 지금도 현실을 구축하면서 삶을 즐기고 싶은 것 같습니다. '현존재-도구적 존재자'의 관계 놀이를 꿈꾸며, 오늘도 뜻하지 않는 변수가 발생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봅니다.
본문의 철학사상은 하이데거의 저서 <존재와 시간 Sein und Zeit>의 132쪽에서 147쪽의 내용을 인용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