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잊고 지냈던 계절이 돌아오다.

by pstomoyo

봄이 오는가 싶더니 꽃이 활짝 만개하는가 싶더니 어느새 비와 함께 벚꽃의 계절이 가고 있다.

정신을 차려 보니 꽃이 지고 또 다음 순서를 기다리던 다른 꽃이 피고. 생전 관심도 없었던 꽃의소생에 눈길이 가는 요즘, 너희도 다 순서가 있었구나, 하고 그 곁을 지나며 나는 마음으로 말을 걸어 보았다.

신혼 초, 산 밑에 자리한 신혼집으로 가는 오르막길 끝에 다다르면 찐한 아카시아 향이 확 퍼지며 코끝을 간지럽혔다. 퇴근 후, 늦은 밤 주황색 가로등 불 아래에서 아카시아 향내를 맡으며 오르는 저녁길은 마치 힘들었던 내 오늘 하루를 보상받는 듯한 느낌으로 내겐 향긋한 위로와 위안이 되었다.

그 길을 함께 오르내리던 오랜 내 연인이자 이젠 남편이 된 그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면 한낮의 따가운 햇살처럼 나를 쫓아오던 수많은 걱정들은 또 다른 세계로 날려버린 듯했다.

마치 나의 낮과 밤이 다른 세계인 것처럼 말이다.

낮엔 더웠지만 아침저녁으로 선선했던 봄의 끝자락에서

“이제 여름이 오려나 봐. 여름 냄새가 나.”

라고 말하자 그는

“ 그런 게 있어?”

라고 내게 반문했다.

계절이 바뀌는 것을 온도로도 제일 먼저 느끼지만 나는 늘 그 계절의 냄새를 기억하고 있는데. 그걸 모른다니 너무 안타깝고 또 신기한 기분이었다.

왜 그런 거 있잖아.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냄새의 기억. 매년 다르긴 하지만 비슷한 온도와 바람이 주는 냄새와 느낌이 있지 않은가. 내가 그 시절 맡았던봄의 내음. 그 장소와 기억.


저녁시간. 주방 정리를 마친 내가 매일 저녁 음식쓰레기를 버리러 내려가는 일이 마지막 순서이다. 아파트 입구를 나서는 순간, 마스크를 뚫고 코를 간질이는 봄내음이 있다. 어제의 냄새와 같은 듯 하지만 조금씩 다르다. 아마도 꽃과 바람과 온도의 조화로 계절의 냄새가 정해지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나는 이 봄내음을,

입시학원 야간 자율학습 교실을 박차고 나와 불안했던 미래를 함께 고민하던 그 시절 친구들과 맡았었고,

어느 저녁엔 고된 알바가 끝난 홀가분한 스무 살 언저리의 내 모습으로 집으로 돌아가는 길목 공원길을걷고 걸으며 맡았었고,

자전거를 타고 온 동네를 누비다 한강 다리를 건너며 강변에 앉아 맥주 한 캔 혹은 커피 한잔 마시며 맡았었고,

회식 후, 지친 몸과 마음으로 알딸딸한 술기운에 밤길을 걸으며 맡았었고,

그 오래되고도 낯선 동네의 신혼집 언덕길에서도 익숙하게 맡았던 내음이다.

봄밤은 그렇게 내 기억 속에 숱한 조각조각들로 자리하고 있다. 그 시절 나와 함께 울고 웃었던 누군가들과 말이다.

잊지 못할 순간들과 때론 잊고 싶은 기억들까지도 모두 봄밤 그 속에 살고 있다. 오늘 밤도 그 봄내음과 함께 나의 기억들이 되살아나 머릿속을 간지럽힌다. 그것을 이제 나는 추억이라 해야지.




작가의 이전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