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에 관한 이야기

이제는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by pstomoyo

지금까지 태어나 결혼하기 직전까지,

나는 독립이란 걸 해보지 못한 채 엄마 아빠의 그늘에서 나름 호의호식(?)하며 자랐다. 지금은 성인이 되면 독립하는 일들이 흔해졌지만, 그때만 해도 집이 지방도 아니고 회사에서 출퇴근 하기 무리없는 한시간 컷 거리였기에 굳이 살면서 엄마 아빠와의 헤어짐을 계획하진 않았더랬다.

그래서 나는 기억나는 순간의 시점부터 엄마 아빠를정말 가까이에서 객관적으로, 때론 주관적으로 지켜보며 살아왔다. 행복한 순간도, 혹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순간들도.. 크고 작은 다툼에도 분명 원인제공자는 있기 마련, 소리없는 내 외침과 다짐, 때로는 외면하기도 하고, 누군가를 향한 응원도 깃들어 있었고 말이다.


아빠는 혼자 시골에서 올라와 어떤 혈연지연의 기댐없이 대기업 임원직까지 해내신 분이다.

회사생활을 하며 대학원을 졸업하셨고, 내가 학생일때에도 아빠가 브리핑이나 프로젝트 또는 승진시험 등을 준비하시며 밤 늦도록 공부 하는 모습을 보아왔다. 입사 이후에도 끊임없는 테스트와 공부, 연구를 해야만 하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아빠의 노력 덕분인지 때 되면 승진하셨고, 승승장구 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어느 날 병마와 싸울 일이 터지고 말았다.

큰 수술을 하고 병가의 기간이 길어지며 아빠의 자리는 오래 비워둘 수 없어 누군가에게 넘겨지고, 본인의 자리는 점차 밀려나고 있었다. 수술 후, 회복의시간이 지나고 아빠는 긴 시간의 회사 생활을 뒤로 하고 퇴직하시게 되었다. 엄마는 정말 진심으로 뜯어말렸다. 애들 학업조차 끝나지 않았는데 학비가 다 지원되는 회사를 왜 그만두느냐는 푸념과 한 서린 말들로 아빠를 설득했지만 아빠도 아빠로서의 최선의 선택을 하셨을터였다.


그 뒤로, 아빠는 한번도 시도해 본적 없는 사업전선으로 뛰어들었다.

참 많은 일들이 벌려졌고, 실패해도 쉼없이 또 다른 일을 시도했지만 결과는 매번 좋지 않았다.

실패해서 접고 새로 시작하는 과정에서 드는 돈도 만만치 않았을거다.

그런 과정에서 엄마와의 다툼과 불화가 깊어졌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돈이 다가 아니지만, 돈은 삶에 있어 필요충분조건임에 틀림없다.

생활은 해야 하는데 평생 집에만 있었던 엄마가 취업전선에 뛰어드는 것 또한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대학생활의 어느 날, 나는 학자금대출을 받고 아르바이트를 하며 대출금을 갚아야 할 상황에 놓이기도했다.

대출에 필요한 서류를 떼고 제출하러 방학 중인 한겨울, 학교로 향하던 버스에서 보던 황량한 창밖의 풍경은 참 쓸쓸했다. 하지만, 나를 왜 이렇게 고생시키느냐고 따질 이유는 없었다. 그냥 그 상황을 묵묵히 견뎌냈을 뿐. 원망하거나 힘들어 하지 않았다.

그렇게 몇학기를 보내고 내 힘으로 돈을 벌어 대출금을 갚고, 회사생활도 시작하게 되었을 무렵,

이제는 가계에 생활비를 보탤 정도 수준의 취업도 하게 되었고 그렇게 조금씩 나아지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앞선 글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엄빠는 긴 시간 연애 후 결혼 했음에도 서로 모르는 것이 많은 채로 살았던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요즘처럼 가까이 살아서집에도 왕래하고 부모님도 뵙고, 그런 시절이 아니었으니 내가 생각했던 것과 현실이 많이 다를 수 있었을 거다.


항상 같이 많은 시간을 보내는 엄마가 아빠를 미워하고 불만을 나에게 토로하면, 나는 자연스럽게 내가 사랑하는 엄마를 이렇게 힘들게 하다니, 아빠는 참 나쁜 사람이구나, 왜 그러는 거지? 라는 의문을 품고 작정하고 미워하진 않더라도 안좋은 감정에 휘둘리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던 것 같다.

내 기억 속 무뚝뚝한 아빠는 자식들에게 살갑진 않아도 늘 우리를 챙겨주셨다.

늦게 퇴근하고 들어와 수술 후 평생 먹어야 하는 약에 의지하며, 늦은밤까지 티비를 보다 쇼파에서 잠드는 아빠를 보면 조금 안됐다는 생각도 들었다. 왜 이렇게밖에 살지 못하는 건지, 화목한 가정의 모습은 티비 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는 가짜 광경인 것일까? 당시 어떻게 나 혼자 해결할 수 없는 부분이라 여기며 그냥 그 상황을 잠자코 지켜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래서 괜히 아빠 옆에 가서 티비보는 척하며 앉았다가 결국 할말이 없어 일어난 적도 몇번이나 있었다.

그리고 엄마와 언니의 방문이 굳게 닫혀있는 모습을보며 거실이 바로 보이는 내 방문은 늘 활짝 열어놓았다. 그것은 아빠를 향한 소심한 내 위로 였을까..


그런 아빠에 대한 내 감정에 큰 변화가 생긴 시점은 바로 결혼이다.

결혼을 하게 되면서, 그 집에서 나와 이제는 정확히 제3자가 된 나의 입장으로 본 아빠는 내게 완전히 다른 이미지로 비춰졌다.

엄마의 개인적인 생각의 굴레에서 비롯된 말들에서 헤어나와 온전히 나 혼자만의 주관으로 본 아빠의 모습은 그닥 나쁜 사람의 이미지는 없었다. 그냥 열심히 살고 있는 나이 지긋한 남편.아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결혼 식 당일, 아빠의 손을 잡고 들어갈 때만 해도 실감이 나지 않아 신부 입장 전 버진로드 앞에서 나는 아빠에게 물었다.

"아빠, 떨려?"

"아니, 하나도 안떨려.^^"

이런 대화를 나누었고, 너무 긴 드레스와 높은 굽 신발에 나는 제대로 걷지를 못했고 아빠에게 이러다 넘어질 것 같다며, 웃으면서 입장을 했더랬다.

이어진 부모님과의 인사에서 엄마는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고, 나도 눈물이 시야를 가려 우는 엄마 말고는 아빠의 얼굴은 미처 보지 못했다.

마지막 순서인 폐백실,

도와주시는 이모님께서 순서를 알려주시며 폐백을 진행했다.

"신부 아버님, 좋은날 덕담과 한 말씀 해주세요~"

아빠는 건강하게 행복하게 잘 살아야 한다며비교적 짧게 이야기 하시곤 말끝을 흐렸다.

이모님께서는 아버님 우시기 전에 마치자며 진행을 서두르셨고, 그때 눈시울이 뜨거워져 목이 메어 더 이야기 못하는 아빠를 나는 보았다. 시간이 지난 뒤,엄마에게 그날의 이야기를 하니 아빠 옆자리에 앉은엄마는 아빠가 우는지도 몰랐다고 한다. 그날 아빠의 눈물의 의미를 나는 대충은 알것만 같았다.


할아버지도 첫째에 6남매에 장손인 아빠.

집안에 제사가 1년에 6번에서 7번정도 있는 집안이다. 시제까지 포함이다.

그 제사의 힘듦과 짐은 모두 맏며느리인 엄마 몫이었다.

엄마는 어느 날 디스크가 터져 큰 수술을 하게 되었고, 그 후로도 몸이 예전같지 않아 쉼없이 병원신세를 졌지만, 아빠의 제사에 대한 완강함은 꺾이지 않았다.

고모들, 집안의 다른 어르신들도 이제 간소화하게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제사 횟수를 줄이거나 겹쳐서 할 수 있는 부분은 합쳐 지내자 등등 어떠한 의견에도 아빠는 동의하지 않았다.

엄마의 호출에 나 역시 명절이고 제사때가 되면 힘들어하는 엄마를 나몰라라 할 수 없어 동참해 전을 부치고 음식을 만들었다. 꼭 해야 하는 음식을 제외하고도 아빠는 가지수를 몇가지 늘려 제사상을 상다리 부러지게 차리고 정성으로 모셨다. 이 정도의 모든 삶이 조상님이 지켜주시고 돌보아 주시는 덕분이라고 생각하시며 할 수 있는 한 계속 제사를 이어가겠다는 의지였다. 그것은 아빠 한 사람만의 의견..이었다.

솔직히 요즘세대에 누가 제사를 지내겠나, 이게 우리세대에 이어질 일인가 아빠대에서 끊어질 게 반은정확해 보여서 였을까? 아빠는 정말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셨다.


그러던 지난 명절,

제사 말미에 마지막 절을 마치며 아빠는 조용히, 그리고 나지막히 이야기하셨다.

"할매, 내년부터는 오지 마이소, 명절제사는 오늘로 끝낼랍니다, 서운해 하지 마시고 마음으로 늘 생각하고 있으니 좋은 곳에서 우리 잘 지켜봐 주이소."

한마디 의논도 없이 갑자기 하신 그 말을 들으며 엄마와 나, 작은엄마, 조카들 모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로를 말없이 쳐다보았다.

엄마는 어쩐일이냐며 화색이 도는 얼굴로 조용히 환호 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그말을 듣던 나는 갑자기 콧등이 시큰거려 눈물이 핑 돌았다.

그렇게 완강하던 아빠가, 얼마나 힘들게 내리신 결정이었을까. 얼마나 오랜 시간 혼자 고민했을까,

마음은 얼마나 불편하실까, 등등 오만 생각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남편에게 아까 그 상황을 이야기 하니 자기도 맘이 쨘했다며 불편한 내 맘을 거든다.


아빠는 은퇴 후, 시골에 내려가서 살고 싶다며 엄마에게 이야기 했지만 엄마는 늙어서 무슨 힘든 시골일을 또 시키려 그러냐, 온몸이 아파 병들었는데 편하게 살다가 가야지. 하며 반기를 들었다.

집을 지은 후 아빠는 엄마의 반대를 이겨내고 옥상에 작은 잔디정원을 만드셨다.

나중에 고향에 내려가 살고 싶다던 아빠의 로망이었나보다 하고 생각했다.

한쪽엔 작은 텃밭도 가꾸어 상추와 고추,가지 등 야채를 바로 따서 씻어 먹을수도 있게 되었다.

개미나 벌레가 생겨 집으로 기어들어오는 일들이 잦았지만 나도 엄마네 가면 가끔 나가서 햇빛도 쬐고

아이들도 비누방울 하고 꽃에 물도 주며 여름에는 작은 풀에 물받아 물놀이도 하는 꽤 많은 시간을 보내는 장소가 되었다.

오랜만에 간 엄마네 정원에 수국이 날 반겨준다.

하늘색. 보라색도 이쁜데 저 크림색 수국도 이쁘네 괜찮다 하고 엄마와 얘기를 나누던 중,

갑자기 천둥 번개를 동반한 소나기가 내렸다.

비바람은 말할것도 없이 옥상은 물바다가 되었고 꽃들은 바람에 꺾일듯 몹시 흔들렸다.

엄마는 예쁘게 핀 꽃들이 다 떨어지게 생겼다며 안타까워하셨다.

다행이 비는 오래지 않아 그쳤지만, 등이 타들어가는듯한 더위에 내가 시원하게 비 뿌려줄께. 하는듯 짧고 굵게 내리고 그쳤다.

간만에 본 수국이 반가워 더웠지만 정원에 나가 사진을 몇장 찍어보았다

한 여름, 베란다에 이불빨래도 널어 말리면 직사광선에 금세 뽀송해지고 바짝 말랐다.


어느 날 저녁, 엄마로 부터 걸려온 전화,

갑자기 아빠가 욕실에서 쓰러지셨다는 이야기. 놀란우리는 한달음에 달려갔다.

쿵! 하는 굉장한 소리와 함께 아빠가 쓰러져 문을 막고 있어 엄마는 열리지 않는 문틈을 비집고 들어가 아빠가 숨을 쉬는지 마는지 확인할 새도 없이 가슴 압박을 하며 심폐소생술을 시도했었나보다.

미워 죽겠다더니, 당장 어찌 잘못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눈앞이 캄캄해져 손이 벌벌 떨렸다는 이야기를 엄마는 우리에게 전하며 우셨다. 이제 정말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 어색하지 않을 나이가 되었구나 싶었다.

이제는 결혼식, 돌잔치 보다도 장례식장에 갈 일이 많아진다는 나이. 세월이 무색하다.

아빠는 그길로 종합병원에 가서 오만 검사를 모두 진행했다.

지병이 있어 해당 병원 환자였기 때문에 의료대란에도 일사천리로 검사가 진행되었다.

다행스럽게도 아무런 이상은 발견되지 않았다.

하지만 넘어지며 생긴 머리에 혹 때문인지 아빠는 두통과 메스꺼움을 호소하며 한동안 살이 쪽 빠지고기운없이 영락없는 할아버지의 모습으로 지냈다.

그 모습을 보자니, 아빠가 이제 많이 늙었네. 많이 쇠약해졌구나. 이제 일도 조금씩 정리를 하셔야겠다싶은 생각이 들었다.


엄마와 아빠가 내 곁에 없다는 사실.

결혼식을 하고 신행을 다녀 온 뒤, 첫 출근 후 퇴근한 저녁, 남편과 내가 새로 장만한 내집으로 들어서는 순간.

아... 이제 퇴근하고 집에 가면 엄마가 없구나. 새삼 느끼며 나는 남편의 존재를 실감했었다.

같이 살지 않아 내집에 엄빠가 없는게 아니라

영영 내곁에 없다면..? 어디로 찾아가도 볼 수 없다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그 기분은 또 얼마나 허망하고 무서울까.


얼마 전, 이슈에 이슈를 더했던 그 드라마속 나래이션이 가슴에 콱 박힌 적이 있다.

"나는 엄마가 되면, 그냥 맨손으로 뜨거운 밥공기를 덥썩 잡을 수 있을 줄 알았어. 그런데 아니야. 나는 지금도 못잡아. 뜨거워. 뜨거워 죽겠어."

아직도 스텐 밥공기를 잡지 못해 매번 남편이 들고 내 앞에 놓아주는 뜨겁디 뜨거운 밥공기.

나도 아직 너무 뜨거운데. 아직도 엄마가 되려면 멀은 걸까..


언제까지고 내 곁에 계실지 모르는 부모님.

여전히 일도 개인적인 사무도 바빠서 한달에 한번도얼굴을 못보고 사는 울 아빠.

그 연세에도 병원 일 때문에 간호조무사를 따시고는

온 가족의 예방접종과 건강을 생각하시는 아빠.

지난 겨울, 나는 독감에 걸려 열이 펄펄 끓고 해열제를 먹어도 차도가 없었다.

물수건을 해주는 남편 뒤로 아빠의 모습이 보였다.

너무 추워 이불을 칭칭감고 누워있는 내게 늦은 밤, 소식을 들은 아빠는 와서 조용히 링거를 놓아주고 가셨다.

그 다음날, 정말 씻은듯이 열이 내려 지내기 훨씬 수월했었다.


그 고마운 마음, 몰라주는게 아니야. 단지 표현을 못하고 사는 것 같다.

살가운 딸이 아니어서 애교도 일도 없이 지내지만, 마음은 알아주셨으면 좋겠다.


사시는 동안 더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조금은 더 재미있게 지내셨으면 하는 바람.

엄마와의 사이도 좀 더 돈독해져 서로 의지하며 늙어가는 노년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

물론 다 이루어지지 않겠지만 그냥 내 바람은 그렇다고..

훗날, 내가 어떤 후회도 하지 않도록..


사진은 아빠의 정원. 수국. 이불빨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