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름밤의 꿈 ; 조성진

그라나다 국제 음악 페스티벌 그리고 피아니스트 조성진

스페인 남부 도시 그라나다(Granada)가 스페인의 필수 관광지가 된 이유는 바로 알함브라 궁전 때문일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궁전'이라고도 불리는 알함브라 궁전은 시에라 네바다(Sierra Nevada) 산맥을 배경으로 삼면이 가파른 언덕 위에 펼쳐진 붉은 요새이자 타지마할의 모태가 된 이곳은 이슬람 건축이 남긴 걸작 중의 걸작으로 꼽힌다. 연간 270만 명의 관광객이 알함브라 궁전을 위해 그라나다를 방문하며, 일일 수용 인원이 제한되어 있어 사전 예약은 필수다. 특히, 성수기 시즌의 티켓을 구하려면 최소 6개월 전에 사전 구매를 해야 할 정도다.

800여 년 동안 스페인을 지배했던 나스르 왕조의 마지막 에미르 무함마드 12세는 아프리카 땅으로 쫓겨나면서 “영토를 빼앗기는 것보다 이 궁전(알함브라 궁전)을 떠나는 게 더 슬프구나."라고 했다고 한다.





상상만으로도 설레는 이 알함브라 궁에서 매년 6월 중순부터 한 달간 클래식 음악, 발레, 오페라, 플라멩코 등 다양한 공연을 볼 수 있는 그라나다 국제 무용 음악 페스티벌(Festival Internacional de Música y Danza)이 개최된다. 시에라 네바다 산맥 앞에 펼쳐질 황홀한 일몰을 생각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이 공간에서 공연을 본다니 더욱 매력적이지 않을 수가 없다.

아라야네스 중정(Patio de los Arryanes) 에서 열린 기타
스페인 친구가 말해주길, "여름에 그라나다 가는 사람들은 스페인 사람들이 아니야. 모두 관광객이지"
그 정도로 그라나다의 여름은 정말 덥다. 40도를 넘나드는 푹푹 찌는 날씨다 보니 시에스타(siesta; 낮잠 시간) 제도가 엄격히(?) 지켜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공연은 매진이고 매년 약 6만 명이 페스티벌을 찾아온다.


올해 70주년을 맞이한 이 페스티벌은 '한 여름밤의 꿈(El sueño de una noche de verano)´이라는 주제로 국내외 110여 개의 크고 작은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관객을 맞이하였다.


사실, 이 페스티벌 프로그램이 꾀 훌륭한 편이라 올해 라인업을 살펴보고자 홈페이지에 들어갔다가 내 눈을 의심했다. 페스티벌의 메인 프로그램인 ‘거장 음악가(Grandes Intérpretes)’에 눈에 익은 사진과 이름이 쓰여 있었다. "Seong-jin Cho"


피아니스트 조성진이 초청된 것이다. 70년 만에 드디어(?) 페스티벌 공식 프로그램으로 한국 아티스트가 심지어 70주년이라는 뜻깊은 페스티벌의 마지막 피날레 공연으로 말이다.

내 두 눈을 의심했던 페스티벌 홈페이지 화면
페스티벌은 알함브라 궁 안에서 개최되는 메인 프로그램 외에 그라나다 도시 내 길거리에서 개최되는 FEX(EXtension del Festival)가 있다. 2014년 국립현대무용단이 작품 <혼합>으로 초청된 적이 있다.


바로 예매를 했고, 그로부터 두 달이 지나 그라나다에 왔다. 예상은 했지만 기차에서 내리는 순간 여기가 찜질방인지 아닌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녹아내릴 것 만 같았고 마스크는 벗어던져버리고 싶었다.




그런데 이 페스티벌... 반칙이다. 궁전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시간여행을 하는 듯하더니 그림 같이 펼쳐진 노을빛은 이미 와인 한 잔이 몸에 최악.. 퍼진 것처럼 분위기에 취하게 만들었다. 아무리 이상한 공연을 봐도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공연장 입구에서 볼 수 있는 그라나다의 일몰.


"최소 공연 시작 한 시간 전에 도착할 것을 권장합니다."

티켓 유의 사항에 가장 먼저 쓰여 있던 문구였다. '최. 소. 한 시간 전?' 코로나19로 절차가 까다롭나 싶었는데 막상 공연장에 와보니 충분히 이해가 갔다. 알함브라 궁전을 네 번째 방문하는 나 조차도 매표소부터 공연장 입구까지 석양이 지는 알함브라를 카메라에 담겠다고 수십 장의 사진을 찍으면서 왔으니.. 그래서인지 유독 다른 공연에 비해 일찍부터 공연장 주변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해가 늦게 지다 보니 대부분의 공연들은 밤 10시, 10시 반에 시작 되어 자정을 넘겨 끝난다.




조성진은 얼마 전 발매된 <쇼팽 스케르초 2번 >에 수록된 4개의 스케르초를 비롯해 슈만의 <유머레스크>, 라벨의 <밤의 카스파르> 프로그램으로 관객들을 맞이하였다. 확실히 실내 공연장보다 피아노 소리의 울림이나 전달력은 덜 했지만, 조성진의 페달 사용은 정말 마술 같았고 음 하나하나 쌓였다 공중에서 흩어지는 소리들은 내가 듣고 있는 게 피아노 소리가 맞는지 보면서도 의심하게 만들었다. 카를로스 5세 궁 안에서 울리는 조성진의 연주는 그야말로 경이로웠다.


앙코르곡으로 어떤 곡을 준비했을까 정말 궁금했는데, 클알못인 남편조차도 알고 있는 쇼팽의 녹턴 Op.9(10년 전 조성진의 연주 영상입니다^^;;)가 공연장에 울려 퍼졌다. 남녀노소 첫마디가 연주되자 공연장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차마 소리를 내지 못하고 두 손을 꼭 모은 나의 몸짓과 같은 이유에서 일 듯하다.

스페인 클래식 음악 전문지 리트모(Ritmo)는 조성진의 앙코르 곡 선택을 두고 "조성진의 앙코르 곡은 너무 뻔한 선택이었다."라고 평했다. 하지만 나는 남녀노소 클래식 애호가가 아니어도 참가하는 페스티벌에서 모두의 귀를 감싸기엔 좋은 선택이었음을 감히 말하고 싶다.




천 년의 흔적을 고이 간직한 카를로스 5세 궁 안에서 수백 명의 사람들이 숨 죽여 조성진을 향한 시선들에 느껴지는 알 수 없는 공기가 소름 돋게 만들었다. 비단 조성진 공연이 아니라도 하루 종일 달궈졌던 돌바닥에서 올라오는 열기와 밤바람의 선선함 그리고 고개를 살짝 들면 무수히 반짝이는 별들은 이 페스티벌을 오게 하는 진짜 이유가 아닐까 싶다.

간혹, 공연을 보면서 내 눈과 귀로 직접 보고 들을 수 있는 눈과 귀가 있어 행복하고, 같은 시대에 태어나서 감사하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공연들이 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본 마르타 아르헤리치(Marta Argerich)와 다니엘 바렌보임(Daniel Barenboin)의 피아노 듀오 공연, 발레리나 박세은을 에투왈로 호명했던 파리 국립오페라 발레단의 <로미오와 줄리엣> 그리고 이 날 알함브라 궁전에서 본 조성진의 공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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