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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가 임상실험 보고서(2)

가족상담

by 몽도리

가족상담을 받으러 청소년 상담 복지센터에 갔다. 부모님과 함께 상담 선생님의 말을 들으며 상담을 받으러 온 엄마와 아빠의 생각을 들었다. 엄마와 아빠는 내가 나아질 수 있다면 어떤 것이든 시도해 보는 것이고 상담 또한 그중 하나일 뿐이라고 크게 거부감이 들지 않는다고 하셨다. 엄마는 초등학생 때부터 지금까지 나와 함께 상담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아무렇지 않다고 하셨다. 그 후 나는 다른 방에 가서 선생님이 주신 설문지를 작성하고 조용히 기다렸다. 상담이 끝난 후 항상 그랬듯이 엄마는 울고 있었고 아빠는 항상 똑같은 어두운 표정이었다. 집에 돌아가자, 엄마는 울면서 감정을 폭발시켰다.


"늘 같은 소리!! 다 내가 잘못한 거지. 내가 자기만족을 위해서 애들한테 공부를 밀어붙인 거지. 다 내 잘못이네, 참 미안하다. 상담 선생님도, 너네 아빠도 다 내 탓이라는데, 나는 너희들이 나보다는 더 좋은 삶을 살길 바래서 그랬던 건데 정말 정말 미안하네!! 근데 언제까지 마누라 탓, 엄마 탓 하면서 살 건데!! 둘 다 나가서 같이 살어 그러면!!"


아빠는 그런 엄마를 보고서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우리 엄마는 '숨어있는 독부모' 유형이자, 나르시시트 성향을 가지고 있다. 아빠는 그와 반대로 인에이블러다. 이 상황에서도 엄마도 이해하고 나도 이해해주려고 하지만 끝은 항상 엄마도 지금 힘들어서 그런 거니까 서로 이해를 해야 한다고 했다. 엄마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상담 선생님은 너와 내 관계가 처음부터 다시 새로 정립되어야 한다고 하는데, 내 나이가 오십이 넘어가는데 어떻게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 그게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이야?"


전형적인 대문자 T처럼 느껴지는 부분이었다. 많은 상담사들이 나르시시스트와 인에이블러 사이에서 자란 아이들은 자기 확신이 없어 자책을 많이 하며 괴로워한다고 한다. 나 또한 돌아오자마자 마음속에 자책이 일어났다. 괜히 가족상담을 받으러 간 것 같아 괴로웠다. 난 엄마를 몰아붙이고 싶었던 게 아니었다. 아빠도 자신이 상담선생님 앞에서는 엄마 편이 아니라 자기의 주장을 드러낸 게 후회스러운지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내 부모가 나르시시스트와 인에이블러 라고 해서 나쁜 것은 아니다. 그저 답답할 뿐이지. 나는 내 부모를 사랑한다. 문제는 나도 이제 지쳐서 독립을 간절히 희망하게 됐다는 것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자기 확신이 없어서 독립이 어렵고 두렵게만 느껴진다. 일망의 설렘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는데, 지금은 없다.


자기혐오를 끝내고 싶었는데 엄마는 나와 동생, 오빠를 비교했다. 오빠와 동생은 아무렇지 않은데 나만 우울증에 걸린 게 이해가 안 된다는 것이다. 내 우울증이 외가 쪽 유전인지 그저 내 성향 때문인지 다른 이유인지 나는 더 이상 원인을 찾고 싶지 않다. 핑계도 찾고 싶지 않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책의 힘을 빌려보고 개인상담을 받는 것이 내가 찾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여기서 내가 궁금한 것은 부모의 양육방식이 자녀에게 어떻게 얼마나 영향을 주느냐이다. 그리고 대부분 3세에서 10세 사이에 성격이 결정된다고 주장하는데 그때 당시 내가 기억하기론 나는 수줍고 무기력한 아이였다. 유치원에서도 뻑하면 울었고, 그때도 엄마가 유치원에 전화를 자주 걸었었다. 그리고 엄마와 아빠의 양육방식에는 차이가 있었으며, 그들은 다른 성향 때문에 자주 싸웠었다.


이런 부부갈등은 자녀 즉, 나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한국 심리 학회지(https://accesson.kr/jkdp/assets/pdf/18471/journal-34-3-115.pdf)에 따르면 부모의 양육방식 중 긍정적 측면의 감독, 애적, 합리적 설명이 높을수록 주의집중 문제, 공격성, 신체적 증상, 사회적 위축, 우울 수준이 낮게 나타났고, 부정적 측면의 양육 방식으로 비일관성, 과잉기대, 과잉간섭은 앞선 정서 문제들과 정적인 관련성을 나타낸다고 한다. 엄마는 비일관성, 과잉기대, 과잉간섭을 가지고 있었고, 아빠 또한 비일관성을 지니고 계셨다. 나는 사회적 위축, 우울, 불안이 매우 높은 사람으로 자라났다. 자,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엄마의 발언이다.


"내가 50살이 넘었는데 이제 와서 내가 어떻게 변해!! 그게 현실적으로 가능한 말이야? 일하고 오면 지치고 힘들어 죽겠는데 말이 어떻게 곱게 나가냐고!!"


맞는 말이다. 내가 엄마라도 그렇게 느낄 것이다. 아직까지도 엄마는 비일관성을 가지고 계신다. 하시는 말씀에 모순이 많고, 이중 잣대도 많다. 하지만 내가 엄마에게 당당하게 말하지 못하는 이유는 엄마가 힘든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내가 엄마라도 지치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다. 심리 상담가 선생님들은 이 사람 저 사람 입장 다 생각해주다 보면 자기 자신은 사라진다고 '나 자신'이 없어진다고 하신다. 하지만 나는 부모님의 입장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중증 우울증에 걸렸더라도 부모님 입장을 생각 안 할 수가 없다. 부모님은 나름대로 엄청 노력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살아오던 방식을 바꾸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나 또한 그걸 알기에 부모님께 쉽게 부탁하지 못한다. 내가 먼저 바뀌어야 한다. 나는 그래도 부모님보다는 나이가 적으니 조금은 더 쉽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부모님은 바뀌어야 할 의무를 가지고 있지 않다. 사실 엄마 말이 맞는 말이기 때문에 더 아프다.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서는 나에게 독이 되는 말은 거르라고 되어 있는데 엄마가 자신의 말 전부는 전부 독성이냐고 자책하는 모습을 보니 또 내가 듣고 싶은 말만 듣는 건 아닌지 고민하게 된다. 이리저리 휘둘리는 게 여기서도 확인된다. 하지만 난 더 이상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도서관에서 매주 하는 인문학 강의에서 이번주에는 '크루엘라'라는 영화를 '지킬 앤 하이드'라는 도서의 연관성이 주제로 나왔다. 강의에서 크루엘라는 강인하면서도 공동선을 추구하는 선한 악녀로 '강인한 선'을 가진 사람이다. 강의에서는 "서서히 본성이자 선한 쪽의 자아를 잃고 두 번째이자 사악한 쪽의 자아로 변해 가고 있다"라는 지킬 앤 하이드의 한 구절이 나왔다. 강연자는 그저 착하기만 한 자아상을 추구하던 때는 끝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균형이 중요하다고 하셨다.


에스텔라와 크루엘라는 '지킬 앤 하이드'처럼 완전 다른 캐릭터이지만 한 몸이다. 결국 죽는 건 에스텔라지만 그렇다고 크루엘라가 악한 일을 일삼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그런 악녀는 아니다. 그녀는 강인한 선을 추구하는 악녀다. 우리가 지금 살아가는 시대에 강조되는 '착한 공격성'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공격성이 떠오른다. 남을 배려하되, 아닌 건 아니라고 딱 집어서 말하는 소통 방식 말이다. 착하기만 해서는 세상을 살아가기 어렵고 너무 이기적으로 굴어도 힘들다. 그 균형을 잡는 게 쉽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힘들어한다. 하지만 이를 지향해 나가다 보면 그와 근접하게 변할 수도 있지 않을까. 크루엘라는 자신의 생모라고 해서 봐주지 않았다. 자신을 양육해 준 부모를 죽였다고 해서 생모에게 그대로 복수하지도 않았다. 정당하게 법의 심판을 받게 해 주었다. '강인한 선'을 가진 악녀. 나 또한 배워야 하는 태도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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