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에 대한 우리의 반응에 대하여
어제 아빠는 차를 주차하다가 말도 안 되는 시비에 걸리고 말았다. 차를 너무 안 쪽으로 몰아 상대편 차량에 있던 아이들이 놀랐다는 것이다. 하지만 막상 부부가 아이들을 데리고 내렸을 때, 아이들은 한없이 해맑은 표정을 지으며 아빠에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상대편 차주는 아빠 차의 창문을 깨부술 듯이 세게 두드리며 내리라고 하며 아빠에게 왜 인정을 안 하냐고 언성을 높였다. 아빠는 처음에는 존댓말을 쓰며 사과를 했지만 상대방이 달려들듯이 굴자, 인내심을 잃고 반말을 하기 시작했다. 미안하다고 했잖아, 딱 이 말이 꼬투리가 잡혀 왜 반말을 쓰냐는 시비가 또 붙었다. 아빠의 목소리를 들은 엄마는 밖으로 나가 단 번에 상황을 종결시켰다. 계속 경찰을 부르겠다는 상대방에게 제발 그러라고 시시비비를 따져보자고 조곤조곤 잘 따지신 것이다. 그것도 존댓말을 쓰면서 말이다. 엄마는 사실 상대방이 아빠를 해할까 봐 걱정하기보단 저렇게 일부러 싸움을 도발하는 사람에게 아빠가 폭발해서 뭔 일을 일으킬까 봐 무서웠던 것이었다. 결국 경찰이 왔고, 경찰은 어이없어하면서 상호 사과를 시켰지만 결국 상대방은 자신이 사과할 이유가 없다며 화풀이를 하고 집으로 들어갔다. 엄마는 집으로 와서 자신이 더 잘 싸울 수 있었다고 하며 아주 아쉬워했다. 그러면서 아빠를 나무랐다.
"상대방이 당신보다 나이가 적든 많든 존댓말은 유지하면서 따져야지. 갑자기 반말을 쓰면 상대방이 더 흥분하잖아요, 경찰을 부른다고 막 협박하면 부르라고 응수해야지, 품위 있게 조곤조곤!! 제발, 좀. 반말 좀..."
아빠는 무안해하며 엄마에게 고마운 듯 고개를 끄덕이며 분을 삭였다. 엄마는 상대가 부부싸움을 하다가 화풀이할 대상을 찾고 있던 것 같다며 당장이라도 또 말싸움을 할 것 같은 포즈를 취했다.
"내가 더 잘 따질 수 있는데, 아주 그냥 내가..."
나는 엄마를 진정시키며 한 수 배웠다. 말도 안 되는 일로 시비가 붙어도 존댓말로 조곤조곤, 경찰을 부르겠다고 하면 상대가 원하는 대로 경찰을 부르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것. 결국 바빠죽겠는 경찰을 자그마한 일로 부르는 사람의 과오가 된다는 것 말이다. 문득 초등학생 때가 기억났다. 남자아이 하나가 나를 한 달 동안 놀리고 괴롭혀서 나는 참고 참다가 실내화 주머니로 그 애의 머리를 후려쳤다. 살살 쳤지만 위협을 느낀 그 아이는 나와 얘기를 나누지도 않고 바로 경찰에 신고했다. 결과적으로 그 애만 경찰에게 혼났다. 그러게 왜 나한테 그랬는지 알 수 없다. 그리고 그 아이, 그 아이의 어머니, 내 어머니, 나, 즉, 4자 대면이 시작되었고, 결과적으로 그 애가 나에게 사과를 하게 됐다. 내가 더 당했는데 경찰에 신고당한 게 억울해서 울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그 일로 왜 경찰을 부르냐고 한 마디 못 한 게 아쉬웠다. 나는 침묵으로 일관하다가 행동으로 나간 타입이었다.
또 하나의 에피소드는 내가 최근에 비가 많이 오는 날 버스를 타려고 정류장에서 기다리다가 비를 맞기 싫어서 정류장 안에 앉아있다가 버스가 오는 걸 보고 탔는데 기사님께서 말씀하시길 밖으로 나와 있어야 내가 탈 건지 안 타는지 알 수 있다며 나와 있어야 한다고 핀잔을 주셨다. 그때 죄송합니다. 한 마디만 하면 됐는데, 평소 같으면 했을 텐데, 그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나는 많은 사람 앞에서 지적을 받은 게 마음에 안 들었던 것 같다. 그래서 모른 척했다. 그냥 한 마디만 하면 되는데 나는 내가 어리숙하고 실수한 사람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다. 버스에는 내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는데 말이다. 아빠와 나는 언짢은 상황이 오면 처음에는 평정심을 유지하다가 나중에는 쌓여서 폭발하는 기질 때문에 결국 상대방과 같은 길을 택하게 된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이런 마인드가 발동하는 것이다. 이건 좋은 점은 절대 아니다. 가끔은 이게 잘 작용해서 정의를 구현하는데 쓰이기도 한다.
학교폭력을 당하는 친구가 있었고 나는 그걸 보다가 선생님께 있는 그대로 말씀드렸다. 학교폭력을 행사하던 친구는 내가 목격자이고 내가 걔 편을 들어줄 줄 알았나 보다. 선생님께 나에게 물어보라 했지만 나는 있는 그대로를 말했다. 당한 아이가 불쌍하다는 생각이나 친한 사이도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이런 일에 대해서는 폭력을 행사한 아이가 합당한 처벌을 받길 원했다. 만약 내가 같은 상황에 처했을 때, 나는 어떤 기분일지 잘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침묵할 때가 꽤 있지만 말을 해야 할 때는 꼭 해야 직성이 풀린다. 내 신간 에세이가 집에 드디어 도착하고 나서 하필이면 청각이 너무 잘 발달한 나는 엄마 아빠가 책의 퀄리티가 좀 떨어지는 것 같다고 서로 얘기하는 걸 듣고 기분이 상했다. 엄마는 내 책을 보더니 자간과 여백에 관해 조언을 해주시기 시작했다. 나는 참고하겠다고 했지만 뭔가 기분이 찝찝했다. 아마 나는 그냥 무조건적인 칭찬을 받고 싶었나 보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나 자신이 걱정되긴 한다. 세상의 거의 모든 말 중 칭찬이 차지하는 비율이 얼마나 될까. 그리고 나는 도대체 무엇이기에 매번 칭찬을 받고자 하는가. 인간은 모두 인정욕구가 있다. 매슬로의 욕구단계이론만 봐도 알 수 있다. 하지만 한 번 기분이 업되기 시작하면 주변의 조언이나 비판은 더 아프게 느껴지는 고질적인 습관이 있다. 그나마 지금은 통찰이라도 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러서 다행이다. 어렸을 때는 가위바위보에서 한 번만 져도 아예 친구들이랑 같이 안 놀았었다. 그걸 보고 엄마는 한숨을 쉬었었다. 나는 내 감정을 무시하고 싶었다. 그렇게 쉽게 삐지고 기분이 상하고 남을 너무 신경 쓰는 내 기질과 내가 그때 가지는 불쾌한 감정들을 말이다. 하지만 무시하면 할수록 내가 가면, 즉, 가짜 페르소나를 쓰게 되는 빈도가 늘며 안에서 곪아버린다. 그러니 두 눈 똑바로 뜨고 바라보려 한다. 감정적으로 공감해 주기보다는 현실적인 조언으로 나를 아껴주는 엄마와 오빠, 그리고 동생 사이에서 살다 보니 감정적 공감에 대한 결핍이 생겨 내가 내 자신에게 칭찬하는 것으로는 성에 차지 않고 타인에게서 구걸하듯 사는 것이다.
이렇게 살면 안 된다. 내가 내 감정의 주인이 되어야 하는 것이지, 타인에게 감정을 구걸하기 위해서 강요하거나 목매달면 안 된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말을 자주 하던 엄마처럼 나도 중간을 유지하고 싶다. 좋은 일도, 안 좋은 일도 너무 크게 반응하지 않고 그 순간만큼은 즐기되, 거기에 너무 빠져 현재를 사는 걸 잊어버리면 안 된다. 나는 아직 성장 중이니 "아이, 뭐야. 나 너무 못 쓰잖아. 그냥 작가 때려치울래!" 이것도 아니고, "뭐야, 나 이제 책도 내는 작가야, 이제 내 꿈은 다 이뤘어!!" 이것도 아닌 그냥 '이번에 도전하길 잘했네. 다음에는 더 나은 질의 책을 만들어서 더 좋은 작가가 되고 말겠어.' 딱 이 정도, 이 정도로 지내자. 그거면 된다. 제발 양극으로 가지 말자. Max가 아니면 Min으로 향하는 감정을 조절할 수 있는 것도 나 자신이다. 예전에 내가 대학을 다닐 때 적어놨던 글귀가 있다.
'자기 과신은 스스로에게 결국 상처를 준다. 어떤 수업이든 아는 것이라도 처음 배우는 듯한 겸손한 태도를 지니며 최선을 다해 임해야 한다. 그렇다고 자신감을 잃으면 안 된다. 난 깨달았다. 내 작문 실력보다도 수업의 색깔, 그 자체인 교수님의 스타일에 대한 센스가 떨어지는 게 내 문제라는 것을 말이다. 그것은 내 실력과도 직결되며, 얻는 것의 정도를 결정짓는다.'
내가 영어 관련 교양과목을 수강할 당시 느낀 것이다. 나는 기고만장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영작을 누군가에서 배운다는 것은 깨 모호한 일이다. 교수님만의 스타일이 있기 때문에 정해진 100%짜리 답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교수님께 내가 쓴 영어적 표현이 틀렸냐고 물어봤다. 이에 교수님은 그게 아니라 자신의 스타일대로 고친 거니 참고만 하라고 하셨다. 아, 어떻게 받아들이고 수정할지는, 그 방법에 대해서는 교수님이 알려주실 수 없다. 내가 또 찾아내야 하는 것이다. 나 자신에게 맞게. 나는 옆에 영어로 글을 적진 않지만 한글로 요약을 참 잘하는 동기의 글을 보았다. 그 글을 내가 번역하니 거의 완벽하다 싶은 글이 나왔다. 요약문은 우리 둘이 같이 할 때 잘 나왔다. 나는 그 아이의 요약 스킬을 배우고 싶었다. 하지만 금세 깨달았다. 잘한다고 느낀 그 아이의 글은 그 아이만의 스타일이라는 것을. 드리마 '정년이'를 보면 옥경 선배는 정년이에게 자신만의 방자를 보여줘야 한다고 말한다. 일맥상통한 얘기다.
요약도 나만의 요약이 있고, 번역도 나만의 번역이 존재하는 것이다. 모두 똑같이 번역을 하거나 요약을 하진 않는다. 그 다양성을 인정하고 다른 사람은 어떤 식으로 했는지 꼼꼼히 관찰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그러다 보면 그 사람의 새로운 관점을 얻게 되는 것이 틀림없다. 그 사람은 나와 세상을 다르게 바라보는 부분이 있고 그 점이 신기하고 새롭다는 것도 알게 되는 것이다. 배움은 그런 것 같다. 수학에도 푸는 방법이 하나만 있는 게 아니듯, 언어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삶도 마찬가지다. 아빠와 내가 상대에게 어떻게 대할지를 결정하는 것도 개개인의 선택이다. 그로 인해 실수를 했다고 해도 성찰을 하는 것은 우리들의 몫이지 타인이 질책할 사유가 못 된다. 만약 상대가 질책을 했다면 충분히 성찰을 마쳤으니 이제는 스스로를 칭찬해 주자.
'오늘도 한 뼘 내적으로 성장했구나, 이럴 때는 이렇게 대처해야 하구나. 신기하다, 앞으로는 다르게 행동해 봐야지.'
이런 마인드로 살면 인생이 실험처럼 재미있고, 실수는 곧 자산이 되지 않을까. 내가 쓴 책들도 전부 자산이 된 것처럼 세상에 쓸모없는 배움은 없고, 그 당시 불쾌하거나 힘든 감정이 든 것 조차도 지나고 나서 객관적으로 관찰하게 되면 엑기스가 남는다. 그걸 손에 꽉 쥐어서 원석으로 다듬는 건 나의 몫. 앞으로 평생 죽기 전까지 내가 해나가야 하는 인간으로써의 과업 중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