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속의 구멍

구멍을 파고든 꽃을 피우는 법

by 칼미아

자해할 때 쓰던 칼을 잃어버렸다. 학교 화장실에 두고 왔나? 다른 사람이 보면 안 되는데. 내 피가 그대로 묻어있을 테니까. 그냥 없어진 채로 있을까 생각을 했다. 그냥 사라진 게 다행이라고 생각하려고 했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 일들은 나에게 충동을 불러일으킨다. 나도 몰랐는데 내일은 9월 모의고사가 있는 날이다. 정말 중요한 시험이지. 여기서 엄마가 말한 2합 10이 나올지 보자. 안 나오면 접시에 코를 박아야 할지도 모른다. 생기부를 뜯어고치고 고쳐도 왜 내 진정한 진로를 3학년 때 정했을까란 후회가 사라지지 않는다. 1학년 때부터 한 개로 밀고 온 애들을 이기지 못할 거라고 단정 짓지 않는다.


하지만 왠지 오빠의 인생을 넘어서서 더 잘 사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다시는 나를 얕보지 못하도록. 그냥 칼이 없는 채로 사는 게 나을 수도 있겠다. 혹시나 발견되더라도 그저 휴지통으로 직행했으면... 다시 사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또 나도 모르게 사고 싶어지는 감정이 들면 잃어버린 게 돈 아깝다. 나는 원래 이런 애가 아니었다. 근데 갈수록 내 마음속의 공허함과 구멍이 커지고 있다. 다 끝난 줄 알았는데 노래 가사처럼 회전목마처럼 일련의 과정들이 반복된다. 되지 않는 것들에 붙어있는 게 얼마나 바보 같은 일인 줄 아는데 조금이라도 바꿔보려고 애쓰는 내가 잘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나는 충분히 아플 만큼 아팠다고 생각했는데 다른 사람에 비하면 덜했나 보다. 보건실 선생님은 내 상처가 나아간다고 하셨다. 내가 그전에 다시 자해를 했다는 사실은 모른 채. 나는 웃으며 그렇다고 대답했다. 1,2 등급대 애들처럼 공부를 잘하는 것도 아닌데 불안할 자격이 있는 걸까. 이 생각을 떠올리는 나에게 해주고 싶었던 말은 감정은 자격의 여부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감정은 본성과도 관련이 있고, 과거의 산물이기도 하다. 점차 쌓여가면서 폭발하기도 하고, 속으로 들어가서 병을 내기도 한다. 마치 씨앗이 풀이 되고 꽃이 피는 것에 대해 자격이 있냐고 논할 것이 없는 것처럼 감정 또한 그렇다. 이 감정을 어떻게 가꾸느냐는 우리 각자의 몫일뿐이다.


그날 나는 크게 반성하며 다시는 이 짓을 반복하지 않기로 마음먹으며 말랑이를 사러 갔다. 뜬금없지만 우연히 상담을 받으면서 몸에 자극을 주며 지압을 하면서 걷는 것이 심신 안정에 도움이 된다는 이야기를 들은 게 기억났다. 시장 사이에 끼여있는 마트에 들어가서 만두 모양의 말랑이를 샀다. 그다음 날, 드디어 오늘, 9월 모의고사를 쳤다. 이상했다. 쉬웠다. 너무 잘 풀렸다. 이렇게 되면 등급이 안 나올 텐데도 나는 그냥 풀리는 것에 기분이 좋았다. 중간중간 불안할 때는 말랑 이를 쪼물딱 거리며 촉감에 집중했다. 효과는 대단했다. 심신의 안정에 도움이 된 것 같았다. 더 이상 잃어버린 칼에 집착하지 않았다. 생전 처음으로 모의고사를 잘 친 것 같았다.


나는 결과를 보기 전에 어떻게 되든 그냥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기로 했다. 세상 모든 게 내 마음대로 되었다면 사는 게 지루했겠지. 물론 원하는 대로 되는 게 더 편할지라도 꼬인 길을 푸는 능력을 가진 게 사람이고 그걸 푸는 방법이 천차만별인 게 우리가 각각 존재하는 이유일 것이라고 생각하며 난 더 이상 내가 두려워하는 것을 피하지 않기로 했다. 시험지를 가방에 챙기고 채점을 기다리며 무척 평온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도대체 뭘 향한 불안일까. 드디어 정답표가 떴고 나는 등급을 확인했다. 영어 1등급, 국어 4등급, 한국사 3등급이었다. 생전 처음 받아보는 등급이 9월 모고에 떴다. 수능도 이대로만 나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희망을 얻었으니 그 불씨를 꺼뜨릴 필요는 없는 거겠지. 나는 앞으로 또 몇 발자국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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