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은 왜 이렇게 생겼을까 15
서울에서 가장 이국적인 동네를 꼽으라면 사람들은 주저 없이 이태원을 떠올린다.
세계 각국의 미식과 다양한 언어가 교차하는 곳,
서울 속의 작은 국제도시.
하지만 이태원이 외국인과 인연을 맺은 연대기는 우리가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깊고 오래되었다.
오래된 이방인의 땅
기록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이태원의 '외국인 집단 거주지' 역사는 고려시대부터 시작된다.
《고려사》에 따르면 말갈족이나 거란족 등 귀화한 외국인들을 남경(지금의 서울 강북) 한곳에 모아 살게 했다고 전해진다.
조선시대에도 임진왜란 이후 남겨진 왜인들이 이곳에 터를 잡고 살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20세기 한국전쟁 이후 주한미군 기지가 들어서며 형성된 지금의 모습은, 어쩌면 우연이 아니라 수백 년 전부터 흐르던 거대한 역사의 관성일지도 모른다.
이름에 새겨진 두 가지 얼굴
'이태원'이라는 지명의 유래에 대해서는 흥미로운 설들이 교차한다. 외국인이 많이 살아 '배다른 사람들이 사는 동네'라는 뜻의 이태(異胎)에서 유래했다는 설과, 큰 배나무가 많아 이태(梨太)라 불렀다는 설이 그것이다.
여기서 '원(院)'이라는 글자에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조선시대의 '원'은 오늘날의 국영 호텔과 같았다.
중앙에서 지방으로 부임하는 관리와 공무상 출장가는 이들의 숙소 역할을 담당했다.
한양도성을 나와서 충청, 전라, 경상도로 이어지는 '삼남대로' 먼 여행길의 첫 번째 숙소가 바로 이곳 이태원이었다.
퇴계원, 장호원, 인덕원, 조치원, 사리원 처럼 '원'자가 붙은 지명들은 모두 누군가 머물다 떠나가던 길목의 흔적이라고 할 수 있다.
사라진 묘지, 그리고 유관순 열사
지금의 이태원 모습과는 도저히 연결되지 않지만, 한때 이곳은 거대한 공동묘지였다. 1930년대 일제강점기, 경성의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자 총독부는 주택난 해결을 위해 이곳을 포함한 시내 몇곳의 집단 묘지들을 외곽으로 강제 이장시키고 택지를 조성한다.
이 과정에서 민족적 공분을 불러 일으키는 사건이 발생했다. 3ㆍ1 운동으로 옥고를 치루다 서대문 형무소에서 순국한 뒤 이곳에 잠들어 있던 유관순 열사의 묘소도 이장 대상이었으나, 무연고 묘로 분류하여 집단 화장하고 말았다.
현재 이태원 부군당 공원에는 열사를 기리는 추모비 만이, 망우리 공원에는 당시 함께 화장된 이들의 합장묘만이 남아 당시의 애통한 역사를 말없이 증언하고 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부군당 공원 일대는 오늘날 서울에서 땅값이 가장 비싼 고급주택가가 되었다.
어쩌면 당연한 이국(異國)
오늘날 이태원 거리에 흐르는 낯선 언어와 이국적인 향기는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다.
고려시대 귀화인들의 거처에서 시작해 조선의 역원, 그리고 현대의 국제 거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이방인의 발걸음이 켜켜이 쌓여 만들어진 결과이다.
그래서 우리가 이태원에서 느끼는 묘한 해방감과 이질감은, 어쩌면 이 땅이 아주 오래전부터 간직해온 본연의 색깔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