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념비전, 사라진 제국의 자의식

서울은 왜 이렇게 생겼을까 16

by 김지웅

기념비전은 서울 도심 한복판,

세종대로 사거리 교보빌딩 옆에 서 있다.

매일 수많은 사람들이 그 앞을 지나가지만, 대부분은 이 작은 전각의 존재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그저 지나칠 뿐이다.


유리와 콘크리트로 둘러싸인 거대한 빌딩 사이에서

이 전각은 마치 시간에서 밀려난 것처럼 조용히 서 있다.

도심 풍경 속에서 어딘가 낯설고 어색해 보인다.


잠긴 문과 읽히지 않는 설명판

전각의 사면은 철창 같은 담으로 둘러싸여 있다.

문은 항상 굳게 잠겨 있어 내부에 들어가 볼 수 없다.

입구 옆에는 작은 설명판 하나가 놓여 있지만

걸음을 멈추고 그것을 읽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래서 기념비전은 늘 같은 모습이다.

도심 속에 서 있지만, 철저히 외면된 채.


‘殿’이라는 이름이 말해주는 것

이 건물의 이름은 기념비전이다.

1903년 9월에 세워졌으며, 전각 안에는

대한제국 황제 고종의 즉위 40주년을 기념하는 비석이 보존되어 있다.


정식 명칭은

‘고종어극40년칭경기념비전’.

여기서 눈에 띄는 것은 ‘殿’(전)이라는 이름이다.

전은 원래 궁궐의 중심 건물인 근정전이나 강녕전 같은 건축물에 붙는 최고 위계의 명칭이다.


황제의 권위를 건축적으로 드러내려는 의도가

이 작은 전각의 이름 속에도 담겨 있는 셈이다.


오래 재위한 군주, 고종

기념비전의 존재는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이미지와 달리

고종이 상당히 오래 재위한 군주였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는 조선 역대 임금 가운데

재위 기간이 세 번째로 길다.

어린 나이에 즉위한 뒤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10년 섭정을 거쳤고

그 이후에도 30년 넘게 국정을 운영했다.


이 기념비는 원래 즉위 40주년이 되는 1902년에 세워질 예정이었다.

그러나 국가 재정이 극도로 악화된 탓에

1년 뒤에야 완공되었다.


사라진 공원과 남겨진 비각

당시 이 전각 주변에는

기념비전을 중심으로 한 넓은 도시 공원이 조성되었다.

황제의 장기 재위와

대한제국의 위상을 기념하는 상징 공간이었다.

그러나 1910년

강제병합 이후

공원은 사라졌다.


오늘날에는 비각만이 남아

도심 속에 홀로 서 있다.

기념비전은

본래의 공간적 맥락을 잃은 채

고립된 건축물이 되었다.


송덕의 언어와 현실의 간극

기념비의 내용은

조선 신민의 염원을 모아 자주국가로서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독자 연호 ‘광무’를 사용하게 된 고종 황제의 덕을 칭송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비석이 세워지던

1900년대 초의 현실은 너무도 암울했다.

조선의 국토는 이미

청·일·러시아 등 열강이 전쟁을 벌이는 각축장이 되어 황폐해졌고

동학농민운동과

임오군란 이후

민심은 크게 이반되었다.


환곡을 비롯한 삼정은 문란하고

관직을 사고파는 매관매직이 성행했다.

국가의 통치 체계는 사실상 붕괴에 가까웠다.

백성들은 하루하루 끼니를 걱정해야 할 만큼

삶이 궁핍했다.


송덕비가 난립하던 시대

그런 상황 속에서

황제의 덕을 칭송하는 전각이 세워졌다는 사실은

어딘가 씁쓸한 여운을 남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시기 조선 각지에는

지방 관리들의 송덕비가 우후죽순처럼 세워졌다.


그 풍경은

조선 말기의 답답한 정치 현실과

왜곡된 권력 인식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오늘, 의미 없이 서 있는 이유

그래서 오늘날 기념비전은

도심 한복판에서 의미를 잃은 채 서 있다.

그러나 어쩌면

그 무심한 모습 자체가 이 전각의 역사일지도 모른다.


기념비전은

대한제국이 스스로를 어떻게 기억하고 싶어 했는지,

그리고 그 기억이

시간이 흐르며 어떻게 도시의 풍경 속에서 희미해졌는지를

조용히 증언하고 있다.


“권력이 자기 과대평가를 할 때 남기는 흔적은 이렇게 맥락을 잃은 채 남는다.”

서울은 이런 식으로 오래된 기억을 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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