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은 왜 이렇게 생겼을까 14
일산방향 강변북로를 달리다보면 양화대교 못미쳐 우측으로 당인리발전소가 보이고, 거기에는 지금도 하얀 수증기를 피워 올리는 커다란 굴뚝이 서 있다.
한강을 따라 봄철이면 흐트러지게 벚꽃이 피는 길.
카페와 산책로, 공연장이 이어지는 그 자리 곁에
지금도 전기를 만드는 화력발전소가 서 있다.
왜 서울 한복판에 발전소가 있을까.
그리고, 지금도 발전을 한다고?
우리나라 최초의 화력발전소
시간을 되돌려 보면, 1920년대 후반
경성의 밤은 점점 더 밝아지고 있었다.
민간의 전력수요와 가로등과 같은 공공 전력수요도 늘어났고, 대중교통수단인 전차 노선은 확장되었으며,
영등포에는 방직 공장 등이 들어섰다.
도시는 전기를 먹고 자라기 시작했다.
하지만 멀리 북쪽의 수력발전만으로는 부족했다.
도시가 필요로 하는 즉각적인 전력을 채우기엔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선택된 것이 화력이었다.
1930년 11월. 경기도 고양군
당인리에서 최초로 1만kW급 1호 발전기가
가동을 시작한다.
오늘의 서울화력발전소, 옛 당인리 발전소다.
왜 하필 이곳이었을까.
한강 하류였다. 발전에 필수적인 냉각수를 얻기 쉬웠다.
경의선에서 갈라진 지선 철도, 이른바 ‘당인선’이 놓였다. 구간이 짧아 건설비용이 절감됐다.
석탄을 실은 화차가 바로 발전소 안으로 들어왔다.
그 철길은 오늘날 홍대앞 문화예술거리 어울마당로가 되었다.
마포는 전차의 종점이었다.
전력 수요가 집중된 자리였다.
경성 인구는
1920년대 24만 명에서 40년대 93만 명으로
치솟고 있었다.
도시는 폭발적으로 커졌고,
전기는 그 팽창을 지탱하는 근육이었다.
그러나 이 발전소의 운명은 단순한 도시 기반시설이 아니었다.
일제 강점기 전력 정책
중화학 공업이 밀집한 북부 지역에 수력 발전을 집중했다.
그들의 대륙 침략을 뒷받침할 산업이 우선이었다.
조선의 대도시와 민간 수요는 늘 뒤로 밀렸다.
그 공백을 메운 것이 당인리였다.
서울의 생명선이 된 당인리발전소
1948년 북한의 갑작스러운 단전 이후,
이 발전소의 의미는 완전히 달라진다.
서울 전력의 90% 가까이를 책임지게 된다.
1970년대 고도성장기에는 서울 전체 전기 소비량의 75%를 공급했다.
이곳이 멈추면 서울이 멈췄다.
그래서 경비를 위해 군부대가 주둔했고
국가 1급 중요기간시설로 지정됐다.
철조망이 둘러쳐졌다.
서울의 심장은 이곳에서 뛰고 있었다.
하지만 시대는 변한다.
연료는 석탄에서 중유로, 다시 LNG로 바뀌었다.
도시의 풍경도 달라졌다.
단독주택이 사라지고 아파트가 솟았다.
환경 기준은 높아졌고, 발전소는 환경오염을 일으킨다는 이유로 민원의 대상이 되었고, 그
굴뚝은 불편한 존재가 되었다.
한때는 국가의 중대사였던 시설이 이제는
도심의 기피 시설로 인식이 바뀌었다.
땅속으로 들어간 발전소
기존의 석탄화력 발전설비를 해체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서울은 발전소를 없애지는 않았다. 대신 땅속으로 내렸다.
2019년 세계 최초의 대규모 도심 LNG 지하 발전소가 들어섰다.
지상 공간은 공원으로 바뀌고,
폐쇄된 4·5호기는 문화공간으로 변신 중이다.
서울은 선택했다.
없애는 대신 숨기는 방식을.
왜 아직도 가동이 필요할까.
수도권 전력 계통에 문제가 생기면
이곳은 비상 공급의 역할을 맡는다.
국가 중요시설에 전력을 보내는 마지막 안전장치다.
전쟁과 재난을 대비한 전략적 인프라이기도 하다.
도시 한복판에 남겨진 것은
단순한 발전소가 아니다.
서울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지워내지 못한 기억에 가깝다.
이 발전소는
식민지 산업정책을 지나
전쟁과 단전을 겪고
경제개발의 불빛을 밝히고
아파트 시대를 통과해
시민 문화공간으로 바뀌며
지하로 숨어든 오늘까지
100년을 견뎌온 서울의 기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