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감영과 성저십리
몇 년 전, 서울 서대문역 인근 디타워 신축 공사 현장 에서 건물의 기초 흔적이 발견되었다. 땅속에서 드러난 이 유적은 조선 시대 경기도의 행정 중심지였던 '경기감영(京畿監營)' 터였다.
오늘날의 도청에 해당하는 이 관청이 경기도가 아닌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발견된 이유는 조선의 도시 관리 체계인 '성저십리(城底十里)' 운영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성저십리, 도성을 지키는 특수 구역
조선은 한양 도성 안의 인구 과밀을 막고 수도의 기능을 보존하기 위해, 성벽으로부터 밖으로 10리(약 4km)까지를 '성저십리'라는 특별 관리 구역으로 지정했다. 이곳은 단순한 외곽 지대가 아니라 도성을 보호하는 완충지대였다.
조선 왕조는 성저십리 내의 무분별한 가옥 건축과 시장 조성을 금지했다. 도성안 백성들의 식량을 생산하고 식수를 관리하고 땔감을 조달하는 산림을 보존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군사적 방어와 왕릉 보존을 위해 인구 유입을 철저히 통제했다. 현재의 용산, 마포, 서대문, 은평, 동대문 일대가 바로 이 구역에 속했다.
경기감영이 서대문에 자리 잡은 이유
경기감영이 서대문(돈의문) 바로 바깥에 위치했던 것은 행정적 효율성 때문이었다. 당시 성저십리의 행정은 한성부와 경기도의 접경 지역인 고양, 양주, 광주, 시흥 4개 경기도의 군이 나누어 맡고 있었다.
한양 도성 안까지만 한성부 관할이었으나, 실제 서울의 경제·사회적 생활권은 성저십리까지 포함된 광역 단위였다. 따라서 경기도를 총괄하는 관찰사는 중앙 정부와 수시로 정책을 협의하고 왕명을 집행해야 했다. 의주대로를 비롯한 주요 도로의 기점이자 대궐과 가까운 서대문 밖은 이러한 업무를 수행하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경기도의 위상과 관찰사의 역할
조선의 경기도는 여타 지방과는 격을 달리했다. 경기도의 수령들은 지방관이 아닌 중앙 관리(경관직)의 품계를 제수받기도 했으며, 경기관찰사는 행정, 조세, 군사, 사법권을 모두 장악한 막강한 자리였다.
역대 경기관찰사의 면면을 보면 조말생, 김종서, 신숙주, 유성룡, 이이, 김상헌 등 왕의 신임이 두터운 핵심 인물들이 포진해 있었다. 이들은 성저십리와 경기도 전역을 관리하며 수도권의 안녕을 책임졌고, 이곳에서의 성과를 바탕으로 영의정 등 정승의 반열에 오르는 경우가 많았다.
규제의 해제와 도시의 팽창
조선 중기까지 유지되던 성저십리의 통제는 구한말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무너졌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성저십리 체제가 사실상 폐지되자, 억제되었던 인구가 급격히 유입되며 도시화가 진행되었다. 서대문, 마포, 용산 일대는 이때부터 본격적인 서울의 중심 시가지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오늘날 서대문역 빌딩 숲 아래 보존된 경기감영 터는 단순히 옛 건물의 흔적이 아니다. 그것은 서울이라는 거대 도시가 경기도라는 배후 지역과 어떻게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성장해 왔는지를 보여주는 결정적인 단서다.
로마의 땅을 파면 유적이 나오듯, 서울의 땅 속에도 성저십리를 관리하며 도성을 지탱했던 조선의 통치 철학이 고스란히 박제되어 있다.
요즘 행정단위를 통합하고 광역화 하는 논의가 한창인 데, 조선시대 한양과 경기도의 성저십리 제도 운영은 참고할 만한 사례가 아닐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