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왜 황금을 포기하고 아파트를 선택했을까?

서울 한복판에 묻힌 금맥과 포기된 선택의 역사

by 김지웅

아파트 아래에서 발견된 것

마포에는 ‘황금아파트’가 있다. 이름만 들으면 건설사 마케팅을 떠올리기 쉽지만 이 아파트 지하에는 말 그대로 황금이 있다. 1998년 재건축을 위한 터파기 공사 중 누런 띠를 두른 돌멩이가 발견되었다. 정밀분석 결과 그것은 금광석이었다. 1톤당 금 함유량은 14.5g, 은은 39.5g. 통상 5g만 넘어도 채산성이 있다는 기준을 훌쩍 넘는 수치였다.

지질조사 결과 금맥은 아파트 부지 약 4천 평과 인접한 국방부 및 민간 소유지 3천 평까지 이어져 있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눈앞에 ‘캘 수 있는 금’이 나타난 순간, 재건축조합과 시공사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서울에서 금을 캔다는 것의 의미

서울 도심에서 금을 캔다는 발상은 곧 현실적인 질문으로 이어진다. 과연 가능할까?

첫째는 허가 문제다. 광업법상 채굴허가는 시·도지사 권한이지만, 서울 한복판에서의 광산개발은 전례가 없다. 환경오염, 주민 민원, 도시안전 문제를 감안하면 행정적으로 승인될 가능성은 극히 낮다.

둘째는 지하 권리의 충돌이다. 광맥은 필연적으로 여러 필지를 가로지른다. 개인 소유지와 공공용지 지하를 통과하는 금맥에 대해 보상과 이익배분을 둘러싼 분쟁은 피할 수 없다. 단 하나의 채굴중지 가처분만 인용돼도 채굴은 중단되고, 그 순간 경제성은 사라진다.

셋째는 시간과 비용이다. 광업권 설정, 채굴계획 승인, 설비투자, 전문인력 확보까지 모든 과정이 비용이며, 수익은 불확실한 미래에 있다. 더군다나 금광 주인이 약 400명이다.


황금광 시대의 기억

이 장면은 처음이 아니다. 한반도는 이미 한 차례 황금에 미친 시대를 겪었다. 1930년대 일제강점기 조선 전역에는 등록 광구만 2만 곳에 달했다. 공무원 지식인 농민 기생 문인까지 신분을 가리지 않고 곡괭이를 들었다.

이는 낭만이 아니라 구조적 필연이었다. 일본은 만주침략과 중일전쟁으로 군비가 급증했고 대공황 이후 외화가 고갈되자 금을 유일한 결제수단으로 삼았다. 한반도는 그 공급지였다.


성공 신화와 그 이면

이 시기 대표적 성공 사례로는 최창학과 방응모가 있다. 최창학은 평안북도 구성에서 금맥을 발견해 금광왕으로 불렸고, 방응모는 폐광에서 재발견한 금맥으로 하루아침에 거부가 되었다. 방응모는 이 자금으로 조선일보를 인수한다.

그러나 이런 성공은 극히 예외였다. 대부분은 실패했고 삶을 잃었다. 이 광풍을 가장 날카롭게 풍자한 작품이 김유정의 단편소설 ‘금따는 콩밭’이다. 작가 자신도 한때 금광을 전전했다는 사실은 이 소설에 현실감을 더한다.


광명동굴, 남아 있는 금

서울 인근의 대표적 금광 유적으로는 오늘날 관광지로 변모한 광명동굴이 있다. 1903년 설립된 시흥광산은 해방 이후 폐광될 때까지 공식 기록으로만 52kg의 금을 생산했다. 전문가들은 여전히 상당한 금맥이 남아 있을 가능성을 말한다.


재건축조합의 현실적 선택

채굴하고자 한다면 총 400여 가구, 대략 약 300여 조합원의 임시 거주 비용은 계속 늘어나고 시공사는 공사 지연에 따른 손해배상을 요구할 가능성이 있었다. 사업은 ‘집을 짓는 일’에서 ‘광산을 운영하는 일’로 바뀌어야 했다. 조합원들에게 제시할 수 있는 확정적 수익도, 기간도 없다. 결국 재건축조합과 시공사는 합의한다. “금맥을 덮고 아파트를 짓자”


이름으로 남은 황금

금은 시멘트 아래에 묻혔다. 대신 아파트 이름에 ‘황금’이라는 단어가 남았다. 지금도 그 아파트 단지 지하에는 금맥이 흐르고 있다. 캐지 않은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포기한 금이다.


어쩌면 이 선택은 탐욕의 결핍이 아니라, 도시가 작동하는 방식에 대한 냉정한 판단이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지금 금값이 비싼지, 아파트 가격이 더 비싼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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