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시내, 하염없는 방랑
왜 집에서 쉬지를 못하니...
대문자 INTJ인 탓에 쉬는 날=집콕인 인종에게 보스2로부터 청천벽력의 연락이 옴. 힘세고 강한 아침! 보스1이랑 잠시 니 숙소에 갈 건뎅 혹시 집에 있을 거? 아뇨. 오늘 지인과 만날 예정이라 그만 오전부터 오후까지 없을 예정입니다. 껄껄. 오후 약속이라 오전에는 집에서 뭉개려 했던 계획이 산산조각남. 그래도 주말까지 보스들을 만나기에는 내 정신줄이 매우 위태로움. 분명히 점심 같이 먹자로 할 텐데 차라리 나홀로 외출이 낫다고 판단. 가시지요 주말의 런던 시내로. ㅅㅂ
오늘은 천천히 걸어서 대영박물관에 (또) 가보기로 함. 다만 식겁해서 호다닥 나오는 바람에 빈속임. 대영박물관 가는 길인 옥스퍼드 스트릿의 러쉬 매장은 식물원 콘셉트(?)인듯 정글처럼 식물이 많음. 2층에 소소한 카페가 있어서 녹차라떼를 시킴. 런던 특징인지 내가 갔던 카페들만 그런지 우유를 너무 미지근하게 데우는 경향이 있어서 플리즈 엑스트라핫 플리즈를 두 번 강조함. 그래도 성에 안 차는 온도. 녹차라떼는 시럽을 전혀 넣지 않아서 호불호 갈리는 맛. 빈속에는 괜찮았음.
솔직히 러쉬에 큰 감흥이 없는지라 녹차라떼를 홀홀 마시며 두리번거리기만 했음. 근데 너무 귀여운 드래곤 포장지를 발견. 스노우 드래곤이라니. 뭔가 매우 구매 욕구를 자극. 아 용은 못 참지. 런던이라도 러쉬 매장은 대단히 프렌들리한 스탭들이 가득함. 여기 와서 이렇게 나에게 관심이 많은 이들을 처음 만남. 여기 무엇이 들었소? 용이 들었다오. 용이라고? 어디 있소? 단품으로도 파오? 여기 있다오.
납죽 엎드린 하늘색 드래곤이 잔뜩 쌓여있었음. 러쉬 제품에 관심 없고 집에 욕조도 없지만 이건 사야 해. 라임 향기가 강렬한 녀석이라 일단 방향제로 사용. 게다가 생긴 게 너무 귀여워서 그 자체로 힐링임.
러쉬 용용이를 조심스럽게 가방에 넣고 다시 옥스퍼드 스트릿으로. 판도라 매장에서 키스 해링과의 콜라보 현장을 목격. 판도라와 키스 해링은 동생의 최애와 최애. 당장 영통으로 이 상황을 보여줌. 한국에는 발매되지 않았다고. 개이득. 꼭 사줘야지.
마침 3주 후에 동생이 런던에 들를 예정이라 그때 함께 방문하기로 함. 다 싫은 런던 출장 중에 동생이 잠시 와준다는 게 너무나 큰 위안이었음.
진열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키스해링 참이 있어서 후일 동생이 왔을 때 매우 즐겁게 쇼핑. 동생은 딱 하나만 사갔는데, 내가 아쉬워서 2종류 더 사줌. 출장이 끝나면 동생 생일이기도 해서 마침 상황이 너무 좋았음. 그나저나 한국 판도라에서는 왜 출시를 안 했을까. 구성과 디자인이 꽤 괜찮고, 국내에도 키스 해링 덕후가 꽤 많은 걸로 알고 있었는데.
할로윈 시즌을 맞아 맘에 드는 물건이 부쩍 늘어난 플라잉 타이거. 덴마크 브랜드인데 코펜하겐보다 런던 매장이 더 싼 이유는 대체 뭘까. 런던 물가도 만만치 않은데 북유럽은 그야말로 티오피임. 근데 아까부터 궁금한 게 공룡이나 드래곤과 할로윈의 상관관계는 무엇일까. 신비로운 서구권의 세계관.
플라잉타이거에서 가볍게 들고 다닐 거미줄무늬 에코백과 온도에 따라 달라지는 해골컵 구매. 할로윈 시즌 제품으로 질이 썩 좋은 건 아니지만 가격이 매우 착하고 마침 필요했던 것들. 숙소에 비치된 식기가 매우 고급의 본차이나 포셀린 티세트인지라 편하게 사용할 머그가 필요했는데 해골컵이라니 완전 마음에 듦. 매일 같이 원효대사가 된 기분.
대영박물관 정문 도착. 대기 없이 입장했던 전날과 달리 외부로 이어진 대기줄에 식겁. 그래도 중간에 짐 검사하는 섹션이 설렁설렁 빠르게 진행되고 있어 대기시간은 길지 않았음. 다만 짐 검사원이 내 가방에 든 플라잉타이거의 해골컵을 보고 이게 뭐냐고 질문받음. 그냥 머그컵인뎅. 매직컵이라니, 매우 위험하고 흥미롭군. 아니 그냥 컵... 알아알아 들어가도 좋다. 대체 뭥미. 이집트관은 패스하려고 했는데 막상 가면 그럴 수가 없단 말이지. 바(영혼)이 드나드는 위문(가짜 문)이 매우 멋있음. 파라오 멘카우레와 솁세스카프의 카르투슈가 있고 우측 하단부에 고위신관이었던 프타셉세스의 이름이 다수 등장. 아마 고왕국시대의 작품.
미노아 문명관에 전시된 매 형상의 황금편. 전반적으로 이집트 유물처럼 보이지만 일단 출토지가 크레타 섬이고 매 머리의 조형 방식 등이 고대 이집트의 전통적인 양식과는 좀 다름. 작품의 제작 주체가 미노아인인지 이집트인인지 불분명하지만 미노아 문명과 이집트 문명이 교류하기는 했던 모양.
헤라클레스로부터 인정사정없이 패대기 쳐지는 중인 네메아의 사자. 그걸 지켜보는 아테나 여신과 헤라클레스 조카 이올라오스.
참 예쁘다고 생각한 고대 그리스의 백색 킬릭스. 킬릭스는 손잡이 달린 큰 술잔이라고 생각하면 됨. 흰 거위 혹은 백조를 탄 아프로디테 여신. 흰 새를 상징으로 하는 여신과 백색 그릇이 매우 잘 어울린다고 생각.
아이를 안은 어머니 여신상. 업장에 로마시대의 대리석 작품이 있어서 해당 도상을 매우 유심히 보게 됨. 이와 같은 도상은 고대 이집트의 이시스 락탄스(아기 호루스에게 수유하는 이시스 여신)부터 기독교의 성모자 이미지까지 지역과 종교를 관통하는 계보를 이루고 있음. 그리스와 로마 시대에도 어머니의 신격을 지닌 여신들에게 이와 같은 도상의 조각상이 봉헌물로 바쳐지기도 했고. 이런 유물들을 보면 지금도 힘들다는 출산이 고대에는 얼마나 어려웠는지, 사회구성원으로서의 아이를 양육하는 어머니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했는지 짐작할 수 있음.
대영박물관 정도 되는 기관에서 선보일 수 있는 신구의 조화. 페디먼트와 프리즈 및 기둥이 부분적으로는 고대 유물이고 부분적으로는 (소속 학예연구원들을 갈아 넣었을) 예상 복원 조형물. 이런 디피는 실제 신전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어서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편.
걷다 보니 어느새 로마 구역. 몰로시안 하운드 혹은 몰로시우스는 고대 개의 일종인데 일각에서는 마스티프의 조상이라고 주장하는 모양. 자못 험상궂은 강아지라고 생각했는데 로마 시대에 군견 역할도 했다고. 이 녀석은 고대 그리스의 청동 원본을 고대 로마인들이 대리석으로 복원한 작품.
2-3층을 연결하는 계단 구간의 벽면에 무심히 걸려있는 로마 모자이크. 벽면에 고정한 좌대와 프레임이 꽤 괜찮아 보인다고 생각했는데, 사진상으로 다시 보니 별로인 듯.
작년에 크리스티였나 소더비였나 회화 문양의 로마 모자이크 경매가가 천정부지로 높았음. 덕분에 우리 업장도 로마 모자이크 가격대가 대폭 상승. 아무래도 공급은 한정인데 수요는 꾸준한 탓인 듯. 좌측 상단의 원형에 묘사된 겨울의 여신은 본 업장에 소장된 사계절의 여신 모자이크 중 겨울의 여신과 도상적으로 공유되는 부분이 많아 흥미로움.
런던에 거주하는 지인 분이 런던 유학생 한 분을 상담해 줄 수 있느냐고 부탁하심. 도움이 될 가능성은 매우 낮지만 그냥 가볍게 대화 나누는 정도면 괜찮다고 했더니 단박에 승낙. 마침 가보려고 했던 명망 높은 런던 포토그래퍼스 갤러리에서 뵙기로 하고 조금 일찍 가서 전시를 봤는데 매우 실망. 모르겠어 의미. 어떤 전시를 하는지 살펴보고 방문하기를 추천.
그대로 갤러리 내부에 그럭저럭 좋은 카페가 있어서 약속 잡고 대화를 나누기에는 참 괜찮은 장소. 기억으로는 카드 결제만 가능. 런던에도 현금 안 받는 카페가 꽤 늘어남. %커피도 그랬고.
귀여운 유학생 분과 즐거운 대화를 마무리하고 각자의 집으로 가던 길에 발견한 특이한 조형물. 뭐지.
집에 가는 길에 이츠에서 유부초밥과 아보카도롤 세트 구매. 개인적으로 아주 좋아하는 메뉴인데 결제해 주는 직원 분이 비건이냐고 물어봄. 미소시루 때문에 그랬나. 집에 와서 해골컵을 열탕소독한 후 호지차를 우림. 뜨겁게 해 주면 눈코입이 생성. 해골 냅킨도 플라잉타이거의 할로윈 상품으로 구매.
진짜 우울증 걸릴 것 같아서 긴급 젤리캣 처방을 내림. 유아용품을 취급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매장 So Tiny London에서 젤리캣 인형들이 대거 전시된 것을 보고 홀린 듯 들어감. 대단히 친절한 여주인 분께서 다정하게 응대해 주셨고 서울에서부터 눈여겨봤던 문어를 구매. 하. 너무 부드러워. 오디세이였나 거창한 라인명을 가진 녀석인데 이제는 그냥 옥토. 지금까지 물고빨고 함께 잘 지내고 있음.
(딱히 그럴 것 같지는 않지만) 사진·본문 불펌은 안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