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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이 Sep 17. 2021

중세, 4단계로 압축하기 (전편)

서양미술사의 계보 #5

그렇다. 그렇게 중세가 시작되었다. 사실 그 시대는 생각보다 어둡지는 않았다. 종교적 사상이 약간 침울하기는 했지만. ‘암흑기’라는 용어를 둘러싼 오해에는 서구권의 중세를 무심한듯 다크하게 보이도록 만드는 요소들이 매우 많은 것도 한 몫을 한다. 현재의 기준에서 한참 부족했던 과학적 사고, 기독교와 민간 신앙 사이의 미묘한 갈등, 게르만족의 이동과 정착에 따른 대혼란(이라고 쓰고 봉기, 살인, 약탈, 방화라고 읽는다), 봉건 영주들의 폐쇄적인 장원 경제, 온갖 비밀과 공포가 공존하는(금서에 독을 바르는 일쯤은 얼마든지 일어날 것 같은) 수도원, 반복되는 기근과 흉작, 무자비한 이단 심판과 마녀사냥 그리고 아이언메이드, 지리하게 이어진 백년 전쟁, 죽음이 춤추는 듯 끔찍했던 흑사병 등등. 어딘가 찝찝하고 어두컴컴한 구석이 있는 요소들이 한데 모여 중세라는 희한한 시기를 구성하는 것처럼 보인다. 각종 인기 있는 판타지 소설들이 이를 부추기기도 했고. 결론부터 말하지만 일부는 맞고 일부는 틀리다. 역사적 근거를 통해 하나하나 긍정하고 부정하기엔 지면과 시간이 부족하기에 이번 챕터에서는 중세 미술만을 다룬다. 여전히 시커멓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매우 휘황찬란한 것들을. 그리스와 로마가 사실적인 표현의 한계치를 추구했다면, 중세의 유럽권은 신앙의 광기가 인간을 어디까지 데려가는지 드러내는 시각적 사례를 쏟아냈다.


초기, 기독교 박해의 미술

중세 미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앞선 시대, 곧 초기 기독교 미술(early christian art)에 대해 먼저 이야기해야 한다. 사실 지난 챕터 4(로마 분열 그 후, 어둠의 시작)에서 거의 다 언급하기는 했지만, 다시 한번 설명할 필요가 있다. 이 시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망 시점부터 로마 제국이 멸망하기까지, 대략 1세기부터 5세기경까지의 시기를 가리킨다. (미술사의 시대 구분이 칼로 무 썰듯 될 수 없음을 항상 이해해주시길 바란다.) 당시 신흥종교였던 기독교는 합법적이지 않은 종파였기 때문에 (그런 시절도 있었다) 로마 제국의 주류 집단으로부터 온갖 박해와 수모를 당할 수밖에 없었다. 신앙을 숨길 필요가 있었던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로마의 지하 공동묘지인 카타콤에 숨어서 비밀리에 예배 의식을 진행하며 복음을 전파했다.


로마 근교의 산 마르첼리노와 피에트로 카타콤 내 천장을 장식한 요나 프레스코. 회화 기술이 퇴화한 게 아니다 퇴화한 게. © Web Gallery of Art.


초기 기독교 회화의 대표 사례로 자주 언급되는 산 마르첼리노와 피에트로 카타콤의 벽화는 그리스·로마 신화와 같은 이교도의 도상(리라를 연주하는 오르페우스 등)과 기독교 주제의 이미지(선한 목자 예수와 요나의 시련은 신약과 구약에 나타나는 죽음과 부활의 예형으로 연결된다)가 혼합되어 나타나는 양상을 보여준다. 시대가 시대인 만큼 당연한 결과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안전을 위한 선택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된다. (보수적인 로마관리: 아니! 이건! 선한 목자 예수 도상이잖아! / 비밀스런 기독교도: 아닌데! 그냥 양치는 목동 그림인데! 로마 신화에도 많이 나오는데! …뭐 이런 식?) 그러나 표현상의 변화는 분명히 포착된다. 그리스와 로마의 예술가들이 중시했던 이상적인 형태, 조화로운 육체, 균형 잡힌 미학은 배제된 반면, 성서의 내러티브에 담긴 성인의 행적과 구원을 이야기하듯 전부 표현하는데 치중한 것이다. 기독교 박해의 시간은 서기 313년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기독교 공인을 통해 서서히 막을 내린다. 전설의 시작 이후 성당과 수도원 등이 본격적으로 세워지기 시작했고, 내부를 장식하기 위한 회화와 모자이크가 대대적으로 시행되며 기독교 미술은 본격적인 발전의 시기로 접어든다.


비잔틴 제국, 종교미술의 황금기

중세의 거대한 축을 담당하는 비잔틴 제국의 미술은 황금으로 이룩한 신앙의 극치를 보여준다. 서기 330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로마 제국의 수도를 비잔티움(로마시대의 콘스탄티노플, 현재의 이스탄불)으로 옮기며 동로마, 곧 비잔틴 제국이 건립됐다. 이와 함께 이 지역의 동방 그리스(Greek oriental) 문화와 초기 기독교 문화가 결합된 비잔틴 미술이 시작된다. 15세기까지 지중해 동쪽의 중세 문화를 담당한 비잔틴 미술은 거대한 중앙돔의 교회 건축, 화려한 모자이크, 금빛으로 빛나는 성상화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공인된 후 종교 강령을 널리 유포하고 신앙심을 고취시킬 목적으로 제작되었기에 그 주제는 당연히 세계의 지배자이자 구원자인 예수, 금빛 배경과 후광에 둘러싸인 기독교 성인들, 성서의 내용을 표현하는데 집중됐다. 성상화와 모자이크는 726년부터 우상숭배의 우려에 따른(이라고 하지만 결국은 동로마 황제와 교황의 권력다툼에 의한) 성상숭배금지령과 성상파괴운동으로 주춤하기는 했지만, 843년 이후 곧 다시 성행하며 비잔틴 미술의 주요 장르로 자리 잡게 된다.


이탈리아 라벤나 산 비탈레의 중앙돔 양식의 성당 외관(좌, Photo by Чигот)과 내부의 어마무시한 모자이크(우, Photo by Yiannis Vacondios).
터키 이스탄불 하기아 소피아의 외관(좌, Photo by Arild Vågen)과 내부(우, Photo by Tranxen). 비잔틴 성당과 이슬람 모스크가 공존해 혼란스럽다.


로마의 바실리카 건축양식을 계승한 초기 기독교 건축에 거대한 중앙돔을 더한 비잔틴 제국의 크고 아름다운 교회 건축은 외관의 장대한 위용과 내부의 미칠 듯이 화려한 모자이크가 압권특징이다. 동로마 제국의 비잔틴 미술 양식을 가장 정확히 찾아볼 수 있는 사례는, 역설적이게도 서로마의 수도였던 이탈리아 라벤나의 산 비탈레 성당이다. 6세기 중반의 비잔틴 종합 예술품이라고 할 수 있는 산 비탈레 성당의 내부는 정신을 잃을 만큼 화려한 모자이크로 장식됐다. 기독교의 상징적인 도상으로 구성된 장면들은 물론, 당시 로마 황제였던 유스티니아누스와 테오도라 황후가 마치 기독교 성인처럼 후광에 쌓인 모자이크가 매우 유명하다. 반면 동로마 제국의 수도에서 그 위용을 자랑했던 하기아 소피아는 재건축 완공에 만족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솔로몬 재꼈다고 신나게 외친 일이 무색하게도 1204년 제4차 십자군의 충공깽 콘스탄티노플 약탈과 1453년 오스만 제국의 메흐메트 2세에 의한 콘스탄티노플 정복 및 이슬람식 구조조정(?)으로 인해 매우 혼란스러운 현재의 모습으로 관광객들의 뜨거운 사랑을 받고 있다.


지중해 서쪽의 암흑기

동로마, 곧 비잔틴 제국이 금빛 찬란한 기독교 문화를 창조하는 동안, 지중해의 서쪽에서는 서로마 제국의 쇠퇴(그리고 설마 했던 476년 멸망), 그리고 각지에서 이주해온 민족 분파들(고트, 반달, 켈트, 바이킹, 게르만 등등)이 정착한 지방 왕국들의 난립으로 두 세기에 걸친 대환장파티를 치르고 있었다. 이 혼란스러운 시기에 관한 고고학적인 증거들은 비교적 적은 편으로(없는 건 아니다) 그야말로 암흑의 시대라고 할 만하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챕터 4에서 이미 다룬 바와 같이 게르만 계통 왕국들의 경쟁과 프랑크족의 대두, 프랑크 왕국의 첫 왕조인 메로빙거 왕가를 개창한 클로비스 1세(재위 481-511)의 로마 가톨릭 개종 등의 사건이 있다. 클로비스 1세에 의해 북유럽 기독교 문화의 초석이 마련된 후, 5-7세기 동안 지중해 서쪽에서는 민족 고유의 문화와 기독교 문화가 뒤섞인 매우 혼란스럽고 기이한 미학이 담긴 작품들이 나타난다.


런던 대영박물관 소장 〈린디스판 복음서〉. 700년경의 채색필사본으로 켈트십자가, 그리스십자가, 용(?), 괴조(?) 등이 혼란스럽게 얽힌다.


고대 영국의 앵글로색슨족이 세운 노섬브리아 왕국령 린디스판 수도원에서 만들어진 〈린디스판 복음서〉의 혼란스러움은 그 대표적인 예시를 제공한다. 노섬브리아가 바이킹족의 약탈에 시달리며 수도원 외부로 피신시켰던 이 채색필사본은 라틴어로 기술됐고 비잔틴 미술의 영향을 받은듯한 복음사가의 형상 등 기독교의 전통을 따르고 있으나, 위의 십자가 페이지처럼 심각하게 복잡한 문양과 동물 도상이 복합된 비기독교적 요소들도 곳곳에 나타난다. 정교한 도안처럼 묘사된 용 혹은 뱀, 부리와 발톱을 지닌 새의 뒤섞인 기하학적인 문양은 그 기원과 영향 관계에 관한 연구가 아직도 진행 중이며 수많은 가설과 논란의 대상임을 미리 밝혀둔다. 이어질 내용에 격한 시비는 걸지 말아 달라는 밑밥 〈린디스판 복음서〉의 십자가 페이지는 기독교 예술을 바탕으로, 게르만족의 매듭 문양과 켈트족의 나선 문양, 복잡하게 꼬인 인터레이스 문양이 자주 등장하는 인슐라 예술 양식 등이 결합된 결과이며, 소위 '동물 양식'(animal style)이라 불리는 문양에서는 중앙아시아부터 동유럽까지 세력을 떨쳤던 유목민족 스키타이의 초원 예술 양식(steppes art, 이들은 매우 뛰어난 금속세공술로도 유명하다)도 부분적으로 영향을 미친 작품으로 볼 수 있다.


더블린 트리니티 칼리지 소장의 〈켈스의 서〉. 서기 800년경의 이 채색필사본은 인슐라 미술의 대표주자로 언급된다.


국내에서 만나는 비잔틴 미술

왜 자꾸 특정 갤러리의 컬렉션을 추천하느냐는 비판이 나올 수도 있는데,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정말로 국내에서 이런 작품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이 없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필자가 해당 갤러리 소속인 탓이다. 앞서 언급했듯, 국내 박물관과 미술관의 소장품은 동아시아 미술 및 동시대 예술에 편중되어 있고, 어른의 사정을 고려하면 기획전시를 기대하기도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도 그 갤러리의 소장 유물을 소개하는 수밖에 없는 사정을 이해해 주시기를 바라며, 바라캇 서울 갤러리의 러시아 성화 컬렉션을 언급하고자 한다. 동로마 제국은 화려한 색채와 장식성을 띤 동방 그리스 양식의 미술을 발전시켰고, 이는 정교회 예술의 근간을 이룬다. 전 세계 정교회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러시아 정교회는 988년 그리스 정교회의 선교로 블라디미르 1세가 세례를 받으며 시작됐고, 비잔틴 미술 양식을 계승한 아름다운 종교 예술 작품을 낳았다.


〈천사와 함께 있는 복음사가 성 마태오〉, 1750-1900 AD, 러시아, 목판에 채색, 바라캇 서울 소장.


참고문헌

에른스트 H. 곰브리치. 『서양미술사』. 백승길, 이종숭 옮김. 예경, 2013.

캐롤 스트릭랜드. 『클릭 서양미술사』. 김호경 옮김. 예경북스, 2010.

H.W. 잰슨, A.F. 잰슨. 『서양미술사』. 최기득 옮김. 미진사, 2001.



미술사 연구는 오늘날의 수많은 학자들만큼 다양한 방향으로 진행되는 현재 진행형의 영역에 놓여 있다. 특정한 예술품이 만들어진 시기에 태어나지 않은 이상 절대적인 진실을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모든 학문이 그렇듯 미술사학 역시 부단한 연구와 사례 분석을 통해 시간의 베일에 가려진 진실에 근접하고 특정한 역사적 맥락에 가장 타당한 해석을 찾아갈 따름이니까. 그러니 의견의 방향이 다르다고 맹렬한 비난을 하시면 아마 울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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