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미술사의 계보 #6
북유럽 기독교 문화의 초석을 마련한 클로비스 1세(재위 481-511년)의 메로빙거 왕가는 카롤링거 왕조에 의해 계승된다. 프랑크 왕국의 카롤링거 왕조를 개창한 피핀 3세(재위 751-768)의 아들 샤를마뉴(=카롤루스 마누스=샤를 대제=카를 대제= 카를로 대제=찰스 대제… 재위 768-814년)는 현재의 프랑스(8세기 아키텐 진압)와 독일(8-9세기 작센-바이에른 공략), 이탈리아(744년 랑고바르드왕국 롬바르디아 철관 획득) 일대까지 큰 세력을 형성했다. 옛 로마의 정통성을 계승하고자 했던 샤를마뉴는 서기 800년 로마 교황 레오 3세로부터 서로마 명예황제로 추대됐고 이는 신성로마제국의 시발이 된다.
로마 제국의 후예를 자처한 샤를마뉴는 현 독일의 도시이자 프랑크 왕국의 수도였던 아헨의 궁정으로 당대 최고의 지성인들과 예술가들을 초청하여 종교, 문화, 사회, 정치적 부흥을 이루고자 했다. 샤를마뉴의 '카롤링거 르네상스'로 불리는 이 문예 부흥 정책은 기독교와 지중해 문화, 게르만 등 타민족들의 정신을 융합하며 유럽 대륙의 암흑기를 끝내고 진정한 의미에서의 유럽 중세 예술을 발아시킨 원동력이 됐다. (카롤링거 르네상스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챕터 4 로마 분열 그 후, 어둠의 시작 후반부를 참고) 샤를마뉴 사후, 프랑크 왕국은 분할 상속제만악의 근원에 의해 동프랑크(독일 기반), 서프랑크(프랑스 기반), 중프랑크(이탈리아 북부 기반)로 3분할 됐다. 동프랑크로부터 이어진 독일왕국의 오토 1세(재위 936-973년)는 로마 교황 요한 12세와 의기투합(?)하고 샤를마뉴의 후예를 자처하며 진정한 의미의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등극했고, 카롤링거 르네상스의 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을 추구한 일명 '오토 르네상스'를 이룩했다.
샤를마뉴의 종교적 야심이 반영된 아헨 대성당은 초기 기독교의 바실리카 양식, 비잔틴 교회 건축의 돔, 로마네스크 양식의 궁륭 등이 모두 나타난 카롤링거 건축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아헨대성당의 청동 늑대의 문(Wolfstür)은 대단히 섬세한 사자 머리 손잡이 조각으로 유명한데(악마와의 계약에 얽힌 전설로도 유명하다), 이는 카롤링거 르네상스의 뛰어난 채색 필사 및 회화 기술과 더불어 금속 공예술의 발달을 보여준다. 이를 계승한 오토 르네상스의 건축은 독일 힐데스하임의 대성당을 통해 확인할 수 있으며, 특히 베른바르트 청동 문에 나타난 성서 에피소드의 부조는 아헨의 늑대 문보다 한층 더 발달한 금속 공예 기술을 드러낸다. 이는 이어지는 11-12세기 동안 성행하는 로마네스크 양식의 초석이 된다.
로마네스크, 로마와 같은 건축물
동로마를 중심으로 비잔틴 미술이 발전하는 동안 서쪽 지역에서는 순례 여행길을 중심으로 로마네스크 미술이 성행했다. ‘로마 같은’이라는 뜻의 로마네스크는 10세기 말엽부터 12세기까지 유럽 각지에 축조된 건축물들이 고대 로마 시대의 석조 건축과 닮은 점으로부터 착안된 용어다. 따라서 좁은 의미의 로마네스크 양식은 로마 제국의 건축 양식을 계승한 중세 유럽 건축물을 일컫는다. 이와 같은 로마네스크 양식은 프랑스 남부, 스페인 북부, 독일 남부, 이탈리아 등지에 남아 있는 수도원 건축에서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성당을 목적지로 한 순례 여행의 길목에 순례자를 위한 수도원, 교회 등이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축조된 사례가 다수 확인된다.
크고 둥근 아치형 궁륭(Vault)이 특징인 로마네스크 건축은 어마무시한 규모의 천장을 지지하기 위해 벽면을 두껍게 축조했고 하중을 견디기 위한 부벽(buttresses)을 더했다. 이와 같은 벽면에는 종교적 상징과 도상이 반영된 정교한 조각이 더해졌는데, 특히 성당 출입문의 상인방 윗부분에 해당하는 반원형 벽면에 최후의 심판과 같은 성서 에피소드를 부조로 장식한 팀파늄과 이를 둘러싼 아치볼트는 로마네스크 건축물에 나타나는 주요 특징 가운데 하나다. 물론 이런 조각들은 단순히 장식의 영역에 머무른 것이 아니라 문맹률이 높았던 당대의 신자들을 위해 기독교 교리와 성경의 교훈적인 내용(대략 착한 자는 천국가고 나쁜 놈은 지옥간다는 내용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전파하는데 적극 활용됐다.
로마네스크 미술의 또 다른 특징은 웅장한 건축물에서 비롯된 기독교적 환상과 비인간적이고 초현실적인 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기둥이나 팀파늄 같은 한정된 공간에 때려박아 넣어진 듯이 정신이 나갈 것처럼 복잡하고 기묘한 로마네스크의 조각들은 장식된 오늘날의 포스트모더니즘 예술에 익숙한 현대인들조차 얼떨떨하게 만든다. 프랑스 수이약의 생 마리 교회 정문은 각종 괴물과 죄인들이 얽혀 정신이 혼미해지는 지옥의 천벌 기둥(a.k.a 수이약의 기둥)과 역동적인 S라인을 과시하며 바쁜 일상을 과시하는 듯한 성 이사야의 조각은 로마네스크로 표상되는 이 시기에 무슨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닌지 고민할 만큼 기상천외하다. 다른 장르라고 사정이 다른 것은 아니었는데, 특히 교회의 스테인드글라스나 수도사들을 중심으로 제작된 채색필사본, 그리고 금속세공품 등도 어질어질한 도상이 나타나 당혹감을 자아낼만한다.
고딕, 대성당의 시대
1200년경부터 독일 등 북부 유럽을 중심으로 본격적인 등장을 알린 고딕 양식은 일반적으로 중세시대라는 용어에 수반되는 뾰족뾰족한 첨탑과 크고 복잡한 스테인드글라스를 특징으로 한다. 고딕 양식이란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한 당시에는 그 저변에 다소간의 비하와 멸시의 뜻을 품고 있었음을 자명하다.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로마 제국의 찬란한 문화를 계승했다는 자부심이 강했던 이들은 그들 북부에 자리한 프랑크족의 문화를 일견 낮춰보는 경향이 있었는데, 이들이 보기에 고딕 양식이란 한 마디로 ‘야만적인 고트(Goth) 족의 스타일’이었다. 그러나 실상은 다르다. 그 ‘북쪽의 야만인’들은 로마의 건축 요소를 바탕으로 초기 기독교의 바실리카 건축으로부터 진화한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축물은 교차 궁륭의 도입 등을 통해 하중의 분배를 의도하는 등 기술적인 발전을 거듭했다. 그러나 성채와 같이 웅장한 로마네스크 건물은 크고 아름다운 상단부의 무리한 무게를 견디기 위해 벽면을 키우고 창문을 최소화 하는 등 내부 면적과 채광의 한계를 안고 있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얇은 석재로 골조와 아치를 정연하고 조직적으로 구성한 늑골 궁륭(rib-vault)의 개발과 도입은 중세의 건축 양식을 획기적으로 교체하고 고딕 성당의 시대를 열었다.
고딕 건축은 석조 건축의 구조를 한계까지 밀어붙인 아찔한 결과물이다. 첨두형 아치(pointed arch)가 유행하면서 고딕 건축은 하늘 위의 천국을 지향하는 수직적 상승성을 포함하게 된다. 이에 따라 높아진 벽면을 지탱하기 위해 건물 외부에 공중 부벽(flying buttress)을 더했고, 천장의 무게를 줄이기 위해 상대적으로 가벼운 늑골 구조의 궁륭 천장을 설치했다. 이렇게 중력의 하중을 감소시키는 신기술을 도입한 결과, 벽에 큰 창을 내고 형형색색의 스테인드글라스를 설치할 수 있었으며, 스테인드글라스에 표현된 회화를 통해 종교적이고 환상적인 세계를 연출할 수 있었다. 이는 플라톤주의와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바탕으로 발전한 스콜라 철학에서 빛을 통해 신의 존재를 나타내고자 했던 시도와 상통하는 부분이 있었다. 이와 더불어 당시 프랑스의 지배가문이었던 카페 왕조와 교황청이 상호 이익에 따른 연대를 맺음에 따라, 생 드니 대성당이나 노트르담 대성당과 같은 초기 고딕 양식의 성당들이 프랑스 지역에 다수 축조됐다.
천국에 더 가까운 높이에의 무시무시한 집착은 고딕 건축의 구조를 극한까지 밀어붙인 프랑스 보베의 생 피에르 대성당(일명 보베 대성당)의 성과와 한계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13세기 유럽에서 가장 높은 성당을 목표로 했던 보베 대성당은 실내 신랑(nave)의 높이를 무려 48m까지 올리며 고딕 건축사의 기록을 새로 썼는 줄 알았는데, 결국 강풍을 버티지 못하고 천장이 무너지며 끝내 공사 중단으로 오늘날까지 보베의 주교좌성당으로 남아있다. 프랑스로부터 수출된 고딕 양식은 각 지역의 실정에 맞는 형태로 계속 발전하는데, 영국의 솔즈베리 대성당이나 결국 대세를 따라(?) 고딕 양식을 수용해 버린 이탈리아의 밀라노 대성당, 독일의 쾰른 대성당 등이 후기 고딕 양식의 다양한 사례들이라 할 수 있다.
국내에서 만나는 로마네스크 미술
서울의 덕수궁 인근에 위치한 성공회 서울대성당은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축물로 유명하다. 한국과 별 인연이 없을 것 같지만, 중세 기독교 사회에서 오랜 시기를 주름잡았던 건축 양식인 만큼 크리스천이 많은 국내에서도 뜻밖의 순간에 로마네스크 건축을 만날 수 있다. 강원도의 횡성성당이나 전주의 전동성당과 같은 카톨릭 성당도 로마네스크 양식에 기초한 한국의 유서 깊은 종교 건물들이다. 특히 성공회 서울대성당의 경우, 측랑(aisle)의 아치 사용 등이 돋보이는 로마네스크 스타일을 따르고 있는 네오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이다. 다만 신랑의 천장이 목조로 이루어져 바실리카 양식에 가까운 특성이 있고, 기와지붕과 한옥형 창살 및 외벽 등은 전체적으로 한국의 건축 양식 요소를 더해 대단히 이국적인 정취를 낸다.
참고문헌
에른스트 H. 곰브리치. 『서양미술사』. 백승길, 이종숭 옮김. 예경, 2013.
캐롤 스트릭랜드. 『클릭 서양미술사』. 김호경 옮김. 예경북스, 2010.
H.W. 잰슨, A.F. 잰슨. 『서양미술사』. 최기득 옮김. 미진사, 2001.
미술사 연구는 오늘날의 수많은 학자들만큼 다양한 방향으로 진행되는 현재 진행형의 영역에 놓여 있다. 특정한 예술품이 만들어진 시기에 태어나지 않은 이상 절대적인 진실을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모든 학문이 그렇듯 미술사학 역시 부단한 연구와 사례 분석을 통해 시간의 베일에 가려진 진실에 근접하고 특정한 역사적 맥락에 가장 타당한 해석을 찾아갈 따름이니까. 그러니 의견의 방향이 다르다고 맹렬한 비난을 하시면 아마 울 겁니다.
본문의 2차 가공 및 무단 활용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