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잘 쓰고 싶습니다.
어느 날에는 미친 듯이 글이 쓰고 싶어 진다. 예전에도 그랬고, 요즘도 가끔 그렇다. 그런 날 글을 쓰면 어쩜 이렇게 술술 쏟아지는지, 마구 갈겨쓰고 바로 첫 번째 독자가 되어서 감탄한다. 글을 내려놓고, 잠깐 숨을 돌리느라 커피라도 한 잔 내려 마시고 나서 다시 글을 읽으면, 백에 구십은 이것도 글이라고 썼는가 싶게 부끄럽고 초라하다.
감성이 가득하고 향이 그윽한 글, 자꾸만 읽고 싶어지는 글, 내 글은 그래야 한다고, 읽힐 때 특히 의미 있어야 한다고 강박을 가지게 된 것은 아마도 처음 내가 매료된 글쓰기가 방송용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어느 유명 방송작가가 알게 되면 참 우습고 하찮겠지만, 고등학교 방송반 작가로 내가 처음 글을 쓰게 된 기억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경쟁률이 어마어마했던 방송반을 뽑던 날, 작가를 지원한 학생들은 3분 안에 주어진 주제에 관해 1분 정도 읽힐 수 있는 짧은 방송 대본을 그 자리에서 써내야 했다. 나는 운이 좋게도, 토너먼트 형식의 그 경쟁에서 최후의 1인이 되어 작가가 됐다.
작가가 된 후로 나는 쉬는 시간에, 새벽에, 아침 등굣길 버스에서까지 틈만 나면 글을 썼다. 어떤 글은 내가 봐도 너무 잘 썼고, 어떤 글은 당장 버리는 게 나을 만큼 보잘것없었다. 알고 있는 이야기란 이야기는 모조리 꺼내어 요리 굴리고 저리 굴려 새 이야기인 척 각색도 해 보고, 책에서 본 글귀를 인용하거나 노래 가사를 인용하기도 하고, 라디오에서 들은 내용을 받아 적어 두었다가 쓰기도 했다.
드디어 내가 적은 대본으로 첫 저녁 방송이 나오던 날, 그날의 떨림과 여운을 지금껏 느끼고 있다. 선배 작가는 첫 방송의 특권이라며 방송실에서 나가 운동장에서 방송을 들어보기를 권했다. 나는 운동장 계단 한쪽 스피커 아래 혼자 앉아 방송을 들었다. 글을 쓰는 이, 글을 듣는 이의 행복함을 오롯이 혼자 느꼈다. 그 순간 세상은 전부 내 것인 양 행복했다.학생들은 저녁을 먹고 교실을 향해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걸어가고 있었고, 예쁘고 넓은 교정에 꽃과 나무가 가득했다. 짙은 푸른색이 주황빛으로 물들여지는 그 시간, 떨리는 마음으로 앉아 여리고 청량한 목소리로 아나운서 선배가 읽어가는, 내가 쓴 글이 소리가 되어 흘러나오는 그 방송을 들었다. 음악이 한 곡 끝나고, 클로징 멘트가 나왔다.
“지금까지 아나운서 ㅇㅇㅇ, 엔지니어 ㅇㅇㅇ, 작가 ㅇㅇㅇ이었습니다.”
내 이름, 작가와 붙어있는 내 이름, 그것을 들었을 때의 환희를 뭐라 표현해야 할지 여전히 모르겠다. 아마도 혼자만 갖고 있고 싶지는 않았던 나의 낭만을 경계 없이 신나게 뽐낸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방송이 끝나고, 친구들이 내 글을 칭찬해줄 때, 선배가 말없이 엄지손가락을 세워줬을 때, 국어 선생님께서 ‘방송 좋더라.’ 하며 어깨를 다독이셨을 때 나는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하고 뿌듯했다.
그 느낌을 잊지 못해서인지, 나는 늘 ‘읽힘’을 의식하고 글을 쓴다. 소리 내어 읽을 때 읽는 이의 입에 달콤하게 잘 감겼으면 좋겠고, 맥이 끊어지지 않아서 잠시 다른 일을 하다 읽는 흐름을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고, 어떤 배경음악과도 잘 어우러졌으면 좋겠다.
이제 고등학교 방송반 작가가 아닌데, 십 대 감수성을 자극할 만한 짤막한 글로 멋 부릴 나이도 아닌데, 좀 더 밀도 있는 흐름과 깊이를 담고 싶은데, 그러기엔 미처 차곡차곡 쌓아두지 못한 내공이 바닥을 드러내는 듯 늘 부족하고 부진해 보여 글을 쓰다가 멈추는 일이 잦다.
소설도 쓰고 싶고, 수필도 쓰고 싶고, 시도 쓰고 싶다. 우울이 바닥을 파고 들어가 늘어지는 절망적인 이야기도, 희망과 낭만을 향하다가 구름 위를 떠 다니는 듯한 몽상의 이야기도, ‘세상에 이런 일이’ 에나 나올 법한 나만 아는 놀라운 경험들도, 가슴 저 끝에 묻어 둔 상처와 분노와 고마움들까지도.
가끔은 내가 너무 드러나 보일까 봐 멈추고, 혹은 타인에게 상처가 될까 두려워 멈춘다. 이해를 얻지 못할까 봐 멈추고, 인정을 받지 못할까 봐 멈춘다.
그래서 요즘 나의 목표는 그저 끝까지 다 쓰는 것이다. 내가 담아내고 싶지 않아서 못 담은 것을 빼버리고도 잘 써 내려간, 잘 읽히는 글을.
욕심을 낼수록, 제약이 많을수록, 글을 끝까지 쓴다는 것은 정말 어렵고 어렵고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너무 재밌고, 너무, 잘 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