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과 자극과 위임의 세계
장담했었다. 큰 소리를 호기롭게 쳤다. 아이를 키우면서 나는 사교육에 휘말리지 않을 줄 알았다. 내가 지금껏 살아 온 삶이 능동적이었다고 믿었다. 그리고 거기에서 쌓아온 경험치가 아이를 키우는 데 밑거름이 되기에 충분하리라고 예상했다. 그래서 이것들만 천천히 알려주면, 나는 늦게서야 깨달아서 놓쳐 버린 것들만 빨리 알게 해 주면 후회없이, 버려진 시간 없이 잘 커갈 것이라 생각했다.
판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모르는 일이다. 아이가 커가는데 세상도 커졌다. 나보다 나은 사람들이 선생님이 되어있는 것 같고, 나는 몰랐던 세상을 알려줄 학원이 자꾸 생겨나고, 귀신같이 알고 핸드폰만 누르면 화면에 온갖 해줘야 할 교육들이 튀어나온다. 마치 나를 안심시킬 것 같은 뉘앙스로 시작되지만 더 심한 불안감을 일으키는 내용들. 미리 가르칠 것 없다는 온갖 천재의 엄마들과, 선행하면 무조건 망한다는 유명 강사들과, 늪에 허우적대는 엄마들을 위해 진정한 조언을 하고자 만들었다는 유튜브 채널들을 보고 있노라면, 이건 늪이 아니라 망망대해에 뗏목을 타고 어디가 목적지인가 두리번거리고만 있는 느낌이다.
불안함이 밀려왔다.
“우리 애는 아직 안 시켰는데?“
“우리 애는 말해줘도 안 하던데?”
내가 가진 것들이 부족해서 타인에게 아이를 위임하기가 싫은 마음과, 엄마의 교육에는 일단 거부감을 내 보이는 아이의 태도,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시작해야한다는 안도를 안겨주며 받아주겠다는 학원들, 이 모든 것이 충돌하면서 하나도 안 편한 마음으로 학원을 하나씩 보내기 시작했다.
아이는 좋아했다. 혼자가 아니라 다수와 함께하는 고난을 즐길만하다고 느끼는 듯 했다. 엄마가 숙제를 내 주는 건 잔소리같고, 선생님의 숙제는 그래도 해야한다는 타당한 책임감이 생기는 듯 했다. 그 때 ‘이렇게 사교육의 늪에 발을 들여놓는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아이도 즐겁고 나는 덜 괴롭고 뭔가를 안 하고 있어서 불안한 마음이 무엇인지는 명확히 모르지만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안도감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불쏘시개가 하나둘씩 날아들기 시작했다. 더 잘하고 싶다는 아이의 욕심 담긴 말, 이것도 시켜보라는 주변인들의 말, 불투명하게 그려지는 아이의 미래를 상상하는 동안 수없이 날아드는 - 성공한 자들이 만들었다는 - 로드맵들. 하나씩 학원을 늘리고 산더미같은 숙제에 치여가는 아이를 보면 하나씩 다시 줄였다.
이게 뭘까, 사교육은 그대로 그 자리에 있고 엄마도 엄마의 자리에 있는데 서로가 서로를 가만두지 않는다. 엄마들의 지갑을 열어야 하는 사교육의 세계를 긍정적이지만은 않은 눈빛으로 바라보면서 멀어졌다 다가갔다를 무한히 반복하게 된다. 가만히 있으면 불안하고 다가가도 불안하고 멀어지면 더 불안한 관계.
해맑게 과자 먹으며 책 보는 일이 제일 행복한 아이를 바라보면서 흐뭇하지만서도 또 언제까지나 저렇게만 있으면 뭔가 안 될것 같아서 결국 일장연설을 또 늘어놓는 엄마라는 사람이 나다.
나는 잘하고 있을까, 내가 엄마로서 잘 한다는 건 뭘 의미할까. 수많은 질문만 해대는 초등맘은 답을 얻고 싶다. 미래를 알고 싶다. 이 모든 불안, 이 모든 자극까지 다 맡아주는 사교육이 있으면 좋겠다. 그런데 또, 그럼 엄마자리까지 뺏기는 거라 그건 안 가져가는 건가도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