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으로 밥먹고 삽니다 17

스니츨 스노츨 스누출

by Mistral

한 해가 가는 건 아쉽지만, 그 끝자락에 크리스마스가 있어서 즐겁다. 깜빡이는 전구과 흥겨운 캐롤송, 반짝이는 트리 장식, 마음을 담은 카드, 빨강과 초록 리본을 감은 선물 상자까지. 어른이 되어도 크리스마스와 관련된 건 무엇이 되었든 설렌다. 그리고 분주해진다. 묵혀둔 소품을 꺼내 장식하고, 올해는 어떤 거짓말로 산타의 정체를 감출지 고민하고, 마음을 전할 작은 선물과 카드를 고른다. 이 설렘과 분주함의 시작과 끝에는 크리스마스 이브 저녁상이 있다.


‘프리츨과 프란츨은 얼른 막내를 방구석으로 데려가서 다리를 하나씩 붙들고 거꾸로 들어올렸습니다. 탁… 탁… 타다닥! 지붕으로 쏟아져 내리는 우박처럼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들은 금화와 은화였습니다. 모두 한슬의 주머니에서 떨어졌습니다.’

<신기료 장수 아이들의 멋진 크리스마스>의 한 장면이다. 가난한 신기료 장수의 아이들은 크리스마스 저녁, 추위와 배고픔에 굶주린 작은 남자를 집으로 들인다. 오두막을 덥힐 난롯불도, 몸을 녹일 이불도, 허기를 채울 음식도 충분치 않았지만 아이들은 무례한 이방인에게 기꺼이 친절을 베푼다. 퉁명스럽고 싸늘한데다 투정만 하는 남자는 사실 요정의 왕이었고, 세 아이에게 감동한 그는 깜짝 크리스마스 선물을 남기고 사라진다. 세 아이는 눈보라를 뚫고 돌아온 아버지와 함께 스니츨 스노츨 스누츨을 만들어 먹었다는 이야기. 이 얼마나 크리스마스다운 이야기인지. 식상하고 뻔하지만 그러기를 바라는 순간들이 있다. 바로 크리스마스가 그런 순간들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저녁상 이야기를 하다가 난데없이 이 그림책 이야기를 꺼냈는고 하니, 나의 크리스마스에도 이런 일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비록 요정의 왕이 주는 선물은 아니지만, 한 해 동안 세 식구가 모은 저금통에서는 500원짜리부터 10원짜리까지 우박처럼 동전이 내린다. 적게는 몇 만원, 많게는 십수만 원쯤 되는 이 돈은 해마다 크리스마스 이브 저녁상을 차리는 데 쓴다.

한 지붕 아래 살고 있는 동반자와는 올해로 스물 여섯번의 크리스마스를 보냈다. 결혼 전에는 크리스마스에 다른 연인들처럼 근사한 호텔 레스토랑도 가고 예약하기 힘들다는 맛집도 다녔다. 그러다가 결혼을 하면서 우리의 크리스마스 리추얼은 집에서 직접 저녁을 만들어 먹고 성당 자정 미사에 참석하는 것이 되었다. 일 년 중 가장 비싼 값의 밥을 사람들에게 치이고 시간에 쫓겨 가며 먹는 게 싫었고, 혼자 먹고 자던 이 도시에 함께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생겼다는 안정감을 누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스무 해의 결혼 생활 동안 자정 미사에 참석하는 것은 출산과 육아, 감염병 때문에 몇 해를 건너뛰었지만, 직접 만든 요리를 먹는 건 한 해도 건너뛰지 않았다.


동전을 세고 예산이 서면 메뉴를 정한다. 그 옛날 요리책과 요리 프로그램에서만 봤던 감히 엄두도 못 냈던 것으로, 이때 아니면 언제 해보겠냐 싶은 것으로, 재료도 비싸고 손도 많이 가고 시간도 많은 드는 것으로, 기분도 티도 팍팍 나는 것으로. 나는 이제 좋은 재료를 충분히 살만큼 돈도 있고, 넓은 조리대도 있고, 조리 도구와 양념과 접시도 많고, 요리도 제법할 줄 알고, 언제 어디서건 정확한 레시피를 알려주는 유튜브 요리 선생님도 계시니까.


메인 메뉴가 정해지면 곁들일 음식과 디저트, 술도 정한다. 그에 맞는 식기도 고르고, 냅킨이나 캔들, 그 밖의 장식도 고민한다. 그림을 그려 보거나 식탁에 미리 세팅해 보는 수고로움도 마다하지 않는다. 주변에서는 대단한 손님이라도 모시냐고 무리하지 말라고 하지만, 1년 365일 같은 상에서 같은 밥과 반찬을 먹는 사람들이야말로 내 인생에 온 가장 대단한 손님이 아닌가. 그러니 일 년에 하루쯤 이렇게 무리하고 공들여 접대할 수 있는 대단한 손님들이 있다는 건 오히려 감사할 일이다.


그렇게 크리스마스에 해먹은 음식은 난이도 초급의 파스타와 피자를 시작으로 갖가지 스테이크, 코코뱅과 부야베스 같은 프랑스 음식, 파에야와 오야 같은 스페인 음식들을 거치며 난이도를 높여 갔으며, 어느 해는 손 많이 가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영국 음식 비프 웰링턴을 해먹기에 이르렀다. 써놓고 보니 거창하지만 사실 몇몇 음식은 맛도 모양새도 겨우 흉내만 낸 정도다. 그럼 뭐 어떤가. 맛이 있으면 있는 대로 모양새가 없으면 없는 대로, 다음해 크리스마스 식탁까지 그 추억을 곱씹어 먹기에는 충분히 맛있고 멋있는 것을.

이 특별한 접대도 십수 년 하다 보니 이제 요령이 생겨 손질이 오래 걸리는 재료는 전주 주말이나 전날 저녁에 미리 준비해 둔다. 그래도 전채부터 디저트까지 다 준비하려면 시간이 넉넉해야 하는 법. 일이 많지 않으면 당일에는 반차를 내고 음식을 만든다. 씻고 다듬고 끓이고 찌고 튀기고 삶고 굽다보면 어느덧 성탄 전야의 밤. 식탁에 초를 켜고 음식을 올리고 카드를 주고받는다. 신나게 먹고 마시면서 한 해 동안 기억에 남았던 일, 고마웠던 일, 서운했던 일을 나누고, 다음 해를 채울 소박한 바람과 계획도 그려본다.


신기료 장수의 말처럼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이라 이렇게 여유롭고 감사한 크리스마스 저녁을 보낼 수 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내 생활과 일을 잘 돌아가게 만드는 요정의 왕 덕분이리라. 마음만 먹으면 나도 누군가의 요정의 왕이 될 수 있을 거다. 몇해 전 겨울부터는 한 해 동안 모은 동전 저금통을 다른 곳에도 쏟아 붓는다. 누군가 그 동전으로 따숩고 배부른 스니츨 스노츨 스누츨을 먹을 수 있도록. 식상하고 뻔하지만, 그러기를 바라는 순간이 있다. 바로 크리스마스가 그런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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