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으로 밥먹고 삽니다 16

회복의 입구

by Mistral

뜨거운 계절과 차가운 계절이 맞닿는 시기가 되면 어김없이 잔기침을 달고 지낸다. 그때 꼭 먹어 줘야 하는 음식이 있다면 그건 바로 무다. 가을 무는 그냥 먹어도 달고, 인삼보다 더 좋다고 했던가. 그래서인지 무가 들어간 음식을 2~3주 먹고나면 잔기침은 어느새 잦아들고, 기관지는 비로소 혹독한 겨울 공기를 견딜 준비를 마친다.

아니나다를까 올해도 여지없이 잔기침이 시작되었고 남편과 아이도 기침 감기로 골골거려 무를 하나 샀다. 깨끗이 씻어 한 조각 잘라 먹어보니, 역시 가을 무답게 달고 시원했다. 이런 무로는 무찜이 제격이다. 다른 양념 없이 무만 무뚝무뚝 썰어 무쇠 냄비에 넣고 멸치와 다시마, 파와 버섯과 함께 푹 찌면 그것만으로도 밥 한 그릇 뚝딱할 수 있는 훌륭한 반찬이 된다.

아이가 연신 맛있다며 무찜을 두 접시나 먹어 치우기에, 맛난 무를 만난 김에 본격적으로 기관지 보양을 해 볼까 싶어 무를 하나 더 주문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 다음날 집 앞에 놓여 있는 건 무 한 개가 아니라 무 한 상자였다. 상자 속에는 그림책에서나 볼 법한 무청 달린 잘생긴 무가 열두 개나 들어 있었다.

하아……. 깍두기를 담는다고 해도 저걸 다 언제 먹나 싶어 무로 만들 수 있는 음식을 하나씩 떠올려 본다. 꼬독꼬독한 식감이 재밌는 무말랭이, 고기 쌈에 빠뜨릴 수 없는 무쌈, 기관지에 좋다는 무 도라지 조청, 선물하기도 좋은 새콤달콤 무 피클, 소고기와 달달 볶아 뭉근히 끓인 뭇국, 제철 꽃게에 된장 풀어 끓인 꽃게 무 찌개, 굴과 쪽파를 곁들이면 혼자서 한솥도 먹는 무밥, 갈치 고등어와 맵싸하게 졸인 생선 무조림, 소주 안주로 제격인 무 어묵탕. 생각만으로도 몇 주 반찬 걱정은 덜었다.

그렇지만 가지가지 무 요리 가운데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들기름에 달달 볶은 투명한 무나물이다. 그냥 좋아하기만 하는 반찬이 아니다. 마음이 허할 때, 속상할 때, 울고 싶을 때 나는 무나물을 먹는다.


결혼하고 6년이 지나도록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아이가 있는 삶을 열망하지도 않았지만, 주변 친구와 동료 너댓이 동시에 우르르 아이를 가지자 조급증이 왔다. 몇 년 노력해도 소용이 없었고, 인공 시술을 시도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규칙적이던 생리가 끊어졌고 임신테스트기에 선명한 두 줄이 떴다. 임신이었다. 병원에서 확인하고 오는 길에 내 손바닥보다도 작은 아기 신발을 사고 얼마나 좋아했는지.

그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7주 차가 되던 날, 계류 유산 진단을 받았고, 믿을 수 없어 다른 병원에 갔지만 결과가 다를 리 없었다. 의사는 당장 수술을 권했지만, 차마 용기가 나지 않아 일주일을 더 버티다가 병원에 다녀왔다. 나쁜 일은 한꺼번에 몰려왔다. 몇 달 뒤 같은 일을 한 번 더 겪었다. 몸은 지치고 마음은 아프고 입은 썼다. 모든 게 다 내 탓인 것 같다가도, 어느 날은 하늘을 원망했다. 먹어도 모래를 씹는 것 같고, 잠만 자면 수술하는 장면이 꿈에 나왔다.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하는 채로 몇 주를 보냈다.

보다못한 남편이 일상과 조금 멀어지면 좋아질 거라며 여행을 제안했다. 그때 떠오른 곳이 안동이었다. 낙동강이 휘돌아가고, 배롱나무 꽃이 만개하고, 오래된 한옥이 단정하고, 무엇보다 좋아하는 몇 가지 음식의 본고장인 그곳.

며칠 머무는 동안 우리는 안동의 맛집들을 찾아갔다. 안동찜닭과 안동국시, 안동헛제밥에 간고등어 정식까지, 평소라면 먹고 뒤돌아서 또 먹을 음식이었지만 입맛은 여전히 제자리였고 삼키는 일조차 힘들었다. 잠도 여전했다. 그렇게 여행 마지막 날이 되었다.

하회마을 한 고택의 안채, 노을에 물든 마을을 느릿느릿 산책하고 돌아왔더니, 방에는 그림 같은 저녁상이 차려져 있었다. 작은 소반 위에는 알맞게 따뜻한 밥과 국, 노릇하게 구워진 간고등어와 전, 그리고 소복하게 담긴 무나물이 놓였다. 고소한 들기름 향 때문인지 반투명한 색 때문인지 정갈한 놋그릇 때문인지,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는 무나물을 한 숟갈 가득 떠서 홀린 듯 입으로 가져갔다.

내내 쓴맛만 돌던 입안에서 단맛이 났다. 설탕보다 진하고 꿀보다 깊은 단맛이었다. 굵어지고 여물어지기까지 천천히 때를 기다리며 모은 단맛. 한 숟갈 더. 부드럽게 익은 무는 씹기도 전에 입안에서 허물어져서 미끄러지듯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배 속 깊은 곳에서 꽁하고 단단하게 맺혀 있던 무언가가 스르륵 풀리는 듯하더니,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그 단맛과 부드러운 식감이 내 속을 살살 달래며, 이제는 좀 놓아도 된다는 듯 나를 위로했다. 나는 울면서 계속 무나물을 퍼먹었다.

무에는 해독 작용이 있다더니 참말이었다. 무나물 한그릇을 먹고 났더니 마음속에 쌓인 나쁜 것들이 눈물로 다 나와 버린 듯했다. 그제야 밥과 다른 반찬에 손이 갔다. 밥 한 숟갈과 간고등어 한 점, 밥 한 숟갈과 국 한 모금, 받 한 숟갈과 전 한 조각. 천천히 꼭꼭 씹어 참으로 맛나게 한 상을 비웠다. 그리고 뜨끈한 아랫목에 푹신한 목화솜 요와 이불 속에서 꿈도 꾸지 않고 내리 열 시간이나 단잠을 잤다.

그렇게 나는 집 나간 입맛과 잠을 무나물 덕분에 되찾았다. 무나물은 내게 회복의 입구가 되는 음식으로 자리했다. 쓴맛 나는 일이 생기면 나는 그날의 무나물을 떠올린다. 천천히 시간을 들여 여문 깊은 단맛. 무나물 한그릇 먹고 한바탕 울고 한나절 자고 일어나면 다시 앞으로 나갈 힘이 생기곤 한다.


그림책 『씨앗 세 알 심었더니』는 토끼가 심은 씨앗 한 알이 싹을 틔우고 뿌리 내리고 굵고 여문 무로 자라는 이야기다. 단순히 무의 한살이를 이야기하는 책이 아니다. 책의 마지막 장면 토끼들은 자신들이 키운 굵고 여문 무를 배불리 먹고 별이 총총한 하늘 아래 걱정 없이 단잠을 잔다. 자연이 빚어낸 결실을 함께 나누며 토끼들은 몸을 채우고 마음을 눕힌다.

작은 씨앗 하나가 긴 시간을 지나 모두를 쉬게 하는 음식이 되었다. 회복이란 결국, 삶이 다시 여물어 단맛이 되는 순간을 기다리는 일이고, 그 단맛은 누군가의 식탁 위에서, 한 그릇의 따뜻한 음식으로 찾아온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그림책으로 밥먹고 삽니다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