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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도박

by 사온


11:38
2025년 6월 30일, 월요일 (GMT+2)파리 시간


풀이 넓어지고 규모가 확장되는 것은 그 분야가 어떤것이든 내 역량에 정확하게 비례하는 것이 맞다는 확신이 드는 요즘이다. 역량이 넘치는 작가가 확장되지 않는 경우도 많고, 정반대로 불균형하게 커진 영향력이 허상이나 기획력에 기댄 경우도 있지만 그 순간부터 부작용이 뒤따르는 것을 보게된다.


인지도를 쌓는 것은, 말그대로 인지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인지된 정도, 액면가 그대로 그 것이 전부다. "무엇으로" 인지되었는다, "왜" 인지되었는가에서 그 풀이 결정된다. 퀄리티가 너무 좋으면 풀은 작아진다. 퀄리티가 너무 낮으면 인지된 이유에서 본질을 상실한다. 인지도가 너무 좋으면 그 정체를 알 수 없다.


인지되지 않은 고유성은 정말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혹은 내가 알아채는 고유성만으로 충분한 것인가?


고유성은 반드시 타인의 인지를 통해 증명되어야만 하는가? 아니면, 내가 그것을 인식하고 지각하는 것만으로도 존재한다 말할 수 있는가? 작업이 어디에서부터 ‘실체’를 갖기 시작할까?


물론, 자기 인식된 고유성은 창작의 출발점이 된다. 내가 감각하고, 형상화하며,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 고유성은 이미 내 안에서 존재한다. 그러나 예술은 그 자체로 사회적 언어이기에, 고유성이 타인의 시야에 들어오고 해석되는 과정에서 비로소 ‘작업’이 되고, ‘위치’를 갖는다.


이때 인지도는 그저 단순한 주목이나 유명세의 문제가 아니다. 고유한 언어가 외부와 연결되는 방식, 그리고 그 언어가 왜 주목받고 있는지에 대한 서사적 설계가 관건이다. 즉, 인지도의 목적이 흐릿하면 그것은 단지 ‘눈에 띔’에 머무르고, 결국 내가 무엇으로 인지되고 있는지조차 제어하지 못하게 된다.


따라서 나에게 인지도는 단순한 노출이 아닌 오리지널리티를 ‘지정하는 기표’로서 기능해야 한다. 이것은 창작의 무게중심을 타인에게 넘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고유성을 보호하고 정당화하기 위한 일종의 전술적 선택이다.


절대적인 가치를 좇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는 공을 들일수록 현실적인 성과보다 승부수와 도박의 성격이 짙어진다. 카뮈의 ‘시지프’, 고흐의 자살 이전의 작업들, 혹은 프랜시스 베이컨의 강박적인 반복... 이 모든 결과는 도박의 최후인 것 처럼 보였다. 물론 그 도박은 기획된 도박이였지만... 그림과 글 작업은 음악 여정 중 생긴 부산물이므로 작업들에 굳이 거리를 둔다. 같은 법칙으로는 다루고 싶지 않다. 더 조율된 방식으로, 더 안정된 호흡으로, 균형 있는 태도 아래에서 만들어가고 싶다.


퀄리티만을 끌어올리는 데 집중하면 작업이 어떤 방식으로 세상과 연결되고 공유될 수 있는지를 놓치게 된다. 그 것은 자존심을 지키는 고결한 태도를 넘어, 현실과 타인의 감각에 대한 무관심으로 이어질 위험이 있다..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만들어왔는지를 먼저 다가가 소개하고 보여주지 않는 한, 세상은 이유 없이 먼저 다가오지 않는다.


아직 모든 게 완벽하게 갖춰지지 않았더라도, 자리라는 것은 결국 사람을 만들어가는 과정 속에 의미가 있다. 시작은 미완일 수 있지만, 자리에 머무르고 책임을 지는 것은 멈추지 않고 이어가는 작업으로 크게 기능하는 것 같다.


그림연습 따로 꾸준히... 조용히 실력쌓자... 내가봐도 그림이 덜 익은 것 같다. 원하는 만큼을 그린다면 3년은 더 그려야 갖춰질 것 같은데, 너무 길게 보고 멀리 보면서 회피하고싶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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