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겪은 말 같지도 않은 일들, 그 나이에 겪지 않아도 될 감정들을 느끼고 체감하며, 그것을 자기 세계로 재해석해 살아낸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작품으로 이어진다는 것은, 결코 배워서 되는 일이 아니다. 같은 경험을 해도 다들 그렇게 살아가는 건 아니다.
예전에 어떤 작가님께서 내 글에 “유기농 작가”라는 댓글을 달아주셨다. 말장난처럼 붙인 말이었지만, 나는 그 표현이 너무 좋았다. 그 말을 보는 순간, 천연기념물처럼 조용히 숨어서 꾸준히 글을 써내려가는 어떤 사람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나와 전혀 다른 입장과 처지에 있는 사람이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봐줄 수 있다고 쉽게 믿지 않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가장 많이 아파본 사람이 가장 있는 그대로를 봐준다. 비뚤어지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아마도 타인이 자신을 그렇게 바라봐주길 원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더 마음이 아프다.
학벌이 높다거나, 특정한 경험을 했다는 것이 그 사람의 전부라고 믿는 태도는 안타깝다. 나에게 “불쌍해서 봐준다”는 식의 시혜적인 태도는 없다. 그럴 자격, 그러지 못할 자격은 필드 위에서 모두 공평하게 주어진다고 믿는다. 책을 좋아하면 좋아할 수 있고, 클래식 음악을 사랑한다면 사랑할 수 있다. 내가 그런 것들을 좋아한다고 해서 허영으로 가득 찬 사람으로 보일지라도, 나는 내 태도를 굽히지 않았다.
아르바이트 중 쉬는 시간에 책을 읽으면 못마땅하게 보던 사람들, 클래식을 좋아한다고 하면 진심이냐고 의심하던 사람들, 미술관에 가거나 조금 독특한 옷을 입으면 이상하게 보던 사람들. 그런 사람들 중에는, 시간이 지나 내가 걷던 트랙을 따라 무언가를 시작하고, 결국 인스타그램에 인증샷을 올리는 이들도 있었다.
그들을 보고 있으면 영화 <쇼생크 탈출>의 죄수들이 떠오른다. <피가로의 결혼> 속 아리아가 울려 퍼지자, 멍하니 그 음악에 잠식되는 장면. 그 장면을 본다면, 더 이상의 냉소는 지워질 것이다.
당신은 단 한 번이라도, 당신과 전혀 다른 배경을 지닌 사람의 목소리에 진심으로 귀 기울여 본 적이 있는가? 그 존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 본 적이 있는가? 나는 내 자신에게도 묻는다. 나는 과연, 나와 다른 출신과 배경을 가진 사람에게 편견 없이 다가간 적이 있었는가?
그렇지 않다면, 그 사람은 아무리 결과를 보여주더라도, 단지 지나치는 사회의 부속물일 뿐이다. 나는 그런 태도로는 예술가를 인정할 수 없다.
“네가 느낀 게 틀렸어.”
라고 말하는 문장이 수십 줄로 이어질수록,
“나도 못 느끼는 걸 네가 어떻게 느꼈다고 할 건데?”
라는 식으로 들린다.
내 기준에서는 고학벌자의 자극적인 기사보다, 체계적으로 배우지 않았더라도 이미 무언가를 꿰뚫고 있는 사람의 한두 마디가 더 숨 쉬게 만든다. 그 말은 뼈를 건드리고, 살갗을 따갑게 한다.
진정성과 절대적 가치라는 것은 입증 가능한 절차적 기준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때로는 그 사람의 이력이, 혹은 겪어온 서사가 되기도 하며, 그 서사를 풀어내는 예술적 테크닉이 되기도 한다. 그것이 허구의 세계에서 펼쳐지는 이야기일지라도, 그 안에 진짜가 있다면, 나는 그것이야말로 당사자의 능력이라고 믿는다.
쳇 베이커를 좋아하는 사람들, 요 정말 많다. 예전에는 재즈 애호가들 사이에서 마일스 데이비스가 손꼽혔다. 그런데 요즘은 취향이 쳇 베이커 쪽으로 급격히 쏠린다. 그 기호가 마치 어느순간부터 마티스를 좋아하는 사람들로 몰리면서 인스타 속 사진이 순식간에 유통되어 눈에 익숙해지고, 무엇이든지 이야기했을 때 누구라도 떠올릴 수 있는 패션 소품처럼 전락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네가 진정으로 재즈를 좋아하느냐” “아무나 재즈 덕후라고 하는 거 좀 그렇다”는 식의 말을 하는 대형 스트리머가 떠오른다. 그런데 사실 그 스트리머는 내가 익명으로 남긴 글귀와 생각들을 그대로 가져다 방송 콘텐츠에 활용했던 사람 중 하나였다. 그 취향 중 하나는, 내가 쳇 베이커를 좋아한다는 것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나는 결국 그 사람에게 경고를 했다. 자유로운 공간이라고 해도 한 사람의 모든 포스팅을 추적해 콘텐츠로 소비하는 일은 부적절하다고 말했다. 그 사람은 이후, 본인이 “말을 하는 직업”이다 보니 내가 겪은 것인지, 자신이 어디선가 들은 이야기인지 헷갈릴 때가 많다고 변명했다.
한 술자리에서, 바로 앞에 앉아있는 사람의 경험담을 마치 자신의 경험담처럼 꺼냈다가, 상대가 자신을 이상하게 보더라는 말로 스스로를 웃음거리로 승화하여 상황을 무마하려 했다. 그러나 그 후에도 그는 내가 쓰는 에세이의 주제를 슬쩍 가져다 콘텐츠로 만들었다. 지금은 그 행보가 눈에 띄게 줄었는데, 아마도 이제는 내가 어느 정도 신원을 드러내고 정식으로 활동을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한때 재즈 역사와 이론을 간략히 강의로 접한 적이 있다. 세부 기억은 많이 유실되었지만, 어느 날 교수님의 사연이 섞인 팟캐스트를 들으며 마음 깊이 파고들었던 음악들이 쌓여갔다.
“취향을 인위적으로 만든 게 아니라, 정말로 마음에 와닿는 것을 좇았다.”
쳇 베이커를 좋아하는 이유는, 아마도 클래식의 요소가 반영된 쿨재즈의 세련되고 담담한 뉘앙스 때문일 것이다. 그 외에도 나는 라틴 리듬을 좋아한다.
만일 내가 그 사람에게 당신은 재즈에 대한 것을 대학에서 제대로 배운적이 없으니, 그 것에 대해 제대로 알고있지 않고, 그 것이 당신의 취향이 될 수 없다고 말했다면 그 사람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말과 글이란 것은 허구의 세계일수록 쓰는 사람 자신을 더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어떤 작가의 취향 역시 쳇 베이커라고 한다. 다른 정보는 없다.
그에 대한 에세이는 없어 소개글만으로 짐작할 수밖에 없지만, 그녀의 소설에 흐르는 냉소적인 기류는 결국 자신 역시 조소의 대상이 된 세계의 일부임을 증명해버린다. 누군가의 진심 어린 열정이나 서툰 취향을 비웃는 듯한 태도를 보일 때면, 나는 차라리 하루키의 글을 읽고 싶어진다. 자신이 사랑하는 것으로 세계를 채운 것.
예술에 미쳐있는 사람을 향한 조소.
정말 모든 사람이 그녀의 소설 속 장면에 제대로 공감할 수 있을까?
그것이 진짜 허영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일까? 아니면, 자신의 열망을 직접적으로 마주하지 않는 방어기제일까.
그 회피는 일종의 위악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예술을 욕망하지 않는 태도는 우아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 고고함은 때로는 무릎을 꿇고 허공에 손을 뻗는 사람 앞에서는 차갑기만 하다. 감히 다가가는 자가 있다면 누군가의 눈에는 서툴지언정 가장 인간적인 고백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진심어린 맨얼굴은 욕망을 하고 있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이미 충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