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6월 8일
지금 하고 있는 모든 종류의 창작을 잠시 멈출 수는 있어도, 아예 없애버려서는 안 되는 이유가 있다.
그 순간에는 내 것이 유난히 이상해 보이지만, 사실 그건 그 당시에만 그런 것이다.
우연히, 뮤지컬 배우 호영의 이야기가 회자된 게시물을 본 적이 있다. 그는 한때 라이트한 목소리와 스타일 때문에 ‘쓸모없다’는 식의 거절을 당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 말 한마디에 스스로 갇혀, 자신감을 잃고, 못하는 점만 파고들며 활동을 줄여나갔다고.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게 아니라 단지 특정한 집단에만 맞지 않았던 이유였을 뿐이었다. 이후 자신을 믿고 꾸준히 이어가자, 마침내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올해 3월 초, 나도 이모티콘을 만들어보려는 시도를 했었다. 많은 사람들이 보는 스레드에 내가 만든 작업을 올리는 일은, 사람들 앞에서 글을 읽고 연주를 하는 것과 비슷한 긴장감을 동반했다.
그때 썼던 글을 보면, 나는 계속해서 자책하고 있었다. 좋은 작가님들이 응원과 격려를 건네주셨는데도,
나는 내 그림을 과하게 깎아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만약 나 혼자 만족했다면, 그림체가 바뀌지도, 지금처럼 발전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업로드하고 나면 자연스럽게 다른 작가들의 작업과 비교하게 되고, 그러면서 나만의 절충안을 찾아가는 장점도 분명히 있었다.
그러다 우연히, 그림도 글도 정말 재미있게 그리시던 어떤 분의 중단 글을 읽게 되었다. 겉으로 보기엔 전혀 문제 없어 보였지만, 그분은 더 이상 활동을 이어갈 이유를 찾지 못했다고 했다. 나는 그분의 작업을 정말 좋아했고, 아쉬움이 컸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나는 혹시, 비전공자라는 자격지심 속에서 ‘실패해도 당연하다’는 식의 핑곗거리를 계속해서 만들고 있는 건 아닐까.
기술은 연습하면 는다. 그리고 내 감성은 내 안에 늘 있었다.
단순한 그림으로 만든 릴스를 제작하는 일이 윤리적 문제로까지 이어질 일도 아닌데, 나는 왜 그렇게까지 스스로를 의심했던 걸까.
때로 이런 글들이 올라온다.
"미술 커리어 조지는 법"
이라는 제목아래,
간단한 그림을 릴스로 퍼뜨려 조회수를 끌고, 자비로 전시를 연 뒤 스스로를 ‘미술인’이라 부르는 사람들을 문제 삼는 글.
그런 글을 보면, 나도 모르게 움츠러들게 된다. 그 기준에 딱 들어맞는 것도 아닌데도, 혹시 나도 누군가에겐 그런 식으로 보이지 않을까, 내 작업이 누군가의 세계에서는 ‘가볍다’고 판단되는 건 아닐까 싶어서.
하지만 오히려 그런 활동들을 좀더 다층적인 시야로 바라보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자비 전시가 아니라 초대전이라 하더라도, 그 분야 외의 유명인이 간단한 그림으로 초대전을 연다면, 그건 초대전이라는 형식을 띄고 있어도 기존 작가들의 길을 가로막는 일이 될 수 있다.
물론 자본주의적 원리를 무시할 수 없는 갤러리의 사정도 이해는 간다. 그렇다면 오히려, 그런 성격의 작업들만을 별도로 모아 전시하는 편이 더 정직한 방식이 아닐까. 실제로 그런 형식이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아트페어가 있고, 내가 참여했던 것처럼 일러스트 중심의 작가들이 자율적으로 그림을 거는, 보다 느슨하고 자유로운 구조의 전시도 있다.
입시에 비유하자면 이는 일종의 특별전형에 가깝다. 작품 자체의 완성도와 무관하게, 다른 기준에서 부과된 패널티 속에서 오히려 일정한 특혜는 반복적으로 부여된다. 불공정은 명분 속에 감춰지고, 제도는 스스로의 정당성을 갱신한다.
세상은 공평하지 않다. 그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달리말해 부적응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감상자의 입장에서 생각해봐야한다. 메세지가 없는 작품이라고 하더라도 그 자체가 메세지가 되는 순수미술의 영역에, 그러니까, 작가의 세계관이 담긴 작품만을 다루는 미술관과 갤러리에 작품이 걸리는데 그 작품이 "패널티가 부과된" 작품이 되고 작가의 타이틀을 위해 걸린다면 다른 의미로 감상자를 향한 폭력 아닌가?
밥그릇 싸움보다 중요한 것은 "구별"이다.
전시라는 행위는 어디서, 어떤 목적 아래 열리는가에 따라 성격이 달라진다. 예술에 정답은 없지만, 위아래가 없는 것도 아니다. 엄연히 ‘하이엔드’와 ‘아류’의 구분은 존재한다. 그 구분이 지워질 때, 오히려 창작자보다 감상자에대한 존중이 결여된 관점도 생각해야한다.
물론, 알폰스 무하의 장식예술이 파리의 뤽상부르 미술관에까지 들어가는 위상을 가지게 된 예는 있다. 하지만 장식예술은 어디까지나 장식예술이다. 순수미술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맥락에서 존재한다. 내 그림은 장식적인 성격을 가진 디자인이다. 굳이 말하자면 상업미술의 영역에 가깝고, 공간을 꾸미기 위한 데코레이션으로 기능할 가능성이 높다. 그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이런 구분을 '무의미한 말장난'이라며 본질을 흐리는 의견도 있었다. 이 것들은 어려운 말 속 갇힌 현학적인 탁상공론이 아니다. 미학이 현실 속에서 구체적으로 작동하는 방식이며, 실용성과 감각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 일이다. 하루 이틀 넘기다보면, 어느 순간부터 서로를 손가락질하며 "우리"와 "남"을 나누는 태도와 입장만 남는다. 그런 경계에 예민하고 싶지 않지만, 그래서 더더욱 그 선을 정확히 바라보면서 나의 길을 걷고싶다.
물론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내 그림 자체를 좋아해주는 관객과 소통한 경험이 실제로 있었다. 지금도 꾸준히 늘어가고 있다. 그래서 내가 하는 활동을 하나의 장르에 가둘 의향은 없다. 그렇지만 그 안에도 세계관이 존재하고 그 세계관이 대충 만들어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것 역시 나라는 인격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전시라는 행위는 “어디서” 열리는지, 그리고 그 공간이 작품의 성격과 어울리는지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 작품 자체로 사랑받는다면, 어떤 기준 없이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여는 일도 가능할 것이다. 예술에는 정답은 없다. 하지만 위아래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이엔드와 아류의 구별은 분명히 필요하다. 그 구분이 모호해지는 상태는, 때로 감상자에게 모욕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사실 미술안에서 나는 창작자이기보다는 자부심있는 감상자이자 애호가에 가깝다. 그리고 그 품위를 잃고싶지 않다.
분위기와 그림의 성격이 잘 어우러지는 공간. 타깃을 설정하고, 여러 장소를 떠올려보기도 했다. 내 작업은 엄연히 상업미술이다. 그래서 나는 내 그림을 걸기에 가장 적절한 장소로 카페를 떠올렸다. 그런데 어느 순간, ‘카페에 그림을 건다’는 단순한 행위가 온라인상에서 왜곡되는 기류를 느끼기 시작했다. 마치 ‘카페 전시’ 자체가 어떤 미술적 의의를 띠는 것처럼—그림이 걸려 있다는 이유만으로 작가적 정당성이 부여되는 분위기가 조만간 갑자기 생겨날 것만 같았다.
아냐... 그게 아냐... 내 의도는 그런게 전혀 아니었는데...
내가 남긴 댓글과 게시글은 꽤나 자주 어떤 전략, 증명과 인정을 위한 방법론으로, 심지어 아직 전문 미술인으로 자리를 잡지도 못한 상황인데도 표방이 된다.
일차원적으로만 해석하고 바라본다면 세상이 참 쉽고 편할 것 같다.
때로는
자비 전시의 진정성이 더 빛날 수 있지 않을까.
그 것이 고액의 금액으로 이뤄지는 대관전시의 성격이 아니라면,
그림의 목적과 그를 담는 공간, 작가의 위치와 방향성을 명확히 이해하고 구별할 수 있다면,
자비 전시는 단순한 포트폴리오가 아니라,
자기만의 목소리를 가진 출발점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력으로서 무용하다는 조롱을 받아도,
그래도 내 세계가 분명 있다고 말하고 싶단 말야...
책도 마찬가지다. 자비출판... 무슨 출판... 여러가지 이야기들이 많지만 나는 그 이용목적과 맥락이 중요하다고 본다. 같은 방식이라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기능을 할 수 있다. 나는 그것이 자본주의를 전면 부정하지도 않으면서 철저히 활용할 수 있는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예술가로서의 윤리적인 태도와 현명한 전략이 결합될 때
재료와 도구로서 충분히 순기능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