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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클하고 몽글해

by 사온

내가 가장 좋아하는 디자이너 언니는 사실 일러스트 세계관 속 캐릭터다. 포메라니안이고, 이름은 ‘애니’.

‘애니’는 언니가 키우는 실제 포메라니안을 모델로 했고, 이름은 언니의 본명 끝 자음과 빨간 머리 앤의 단짝 친구 ‘다이애나’를 섞어 만든 것이다. 사실 ‘애니’라는 이름은 앤 셜리의 본명에서 따온 것이기도 하다.


극 중 앤은 길버트와 결혼해 아이를 낳는데, 그들 중 쌍둥이 자매의 이름은 자신의 본명 ‘앤’과 친구의 이름 ‘다이애나’를 반씩 따서 ‘낸’과 ‘다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나는 언니와 같은 집에서 위층과 아래층을 나눠 쓰며 살고 싶다고 자주 상상했다. 아랫층에는 언니의 작은 공방이 있고 가끔 동네 사람들을 위해 까페를 운영하면서... 나는 위층에서 연주 여행을 떠나거나 돌아오거나, 자유롭게 드나드는 삶. 우린 둘 다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하고, 각자의 삶도 연애도 존중하는 사람들이니까,

서로의 공간이 보장되는 집을 갖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말은 함부로 꺼낼 수 없었다. 기약 없는 약속만 남기고 멀어질까 봐, 조심스러웠다.

그런데, 어느 날 내가 갑자기 일러스트를 그리고 낑낑대는 걸 보던 언니가 불쑥 말했다.


“나, 능력만 되면 너 작업실 차려주고 싶어.”


서로의 마음이 이렇게 같을 수도 있다는 게 그저 신기하고, 조금은 뭉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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