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인간에게 견딜 수 있는 만큼의 시련을 준다고 하던데 정말 그런 걸까?
우리는 이 시련들을 견딜 수 있었던 걸까?
그래서 우리에게 이 같은 일들이 일어났던 걸까?
죽고 싶을 만큼 힘든 시간들이 지나갔다.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게 휘리릭 지나간 것 같다. 그때는 너무 힘들었는데 지나고 보니 '우리가 잘 버텨냈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이제는 그때의 일들을 슬프지 않게 말할 수 있다. 이따금씩은 감정에 북받쳐 울컥하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 후에도 여전히 속상할 때가 있고 '페닐케톤뇨증이 아니었다면.'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이제 우리는 죽음 따위는 생각하지 않고 잘 살아내고 있다.
우리는 그때 매일을 죽고 매일을 살면서 결국 살아냈다.
죽음이 우리를 집어삼키게 내버려 두지 않고 잘 버텨냈다.
'잘 살 수 있을까?'에서 '잘 살 수 있겠다'로 바뀌었다.
이번일을 계기로 우리는 각자 나름대로의 견뎌내는 삶, 버텨내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나대로 아이는 아이대로 또 다른 누군가는 그 사람의 나름대로, 각자의 버텨내는 방법이 다를지라도 우리는 그 자리에서 견디고 버티며 살고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얼마만큼의 고통과 얼마만큼의 기간 동안 견디고 버텨야 할지는 모르지만 최선을 다해 매일 우리는 버텨내는 삶을 살고 있는 것 같다.
그 시간이 지나가지 않을 것만 같았는데 시간은 또 흐른다. 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살아낸 것이 아니라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내다 보니 살아진 것이다.
둘째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첫째 아이 육아를 하며 힘들게 할 때마다 되뇌이는 문장이 있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둘째를 낳고는 이런 생각을 한참 하지 않다가 이 이야기를 하다 보니 오랜만에 생각이 났다. 그때는 이런 생각을 할 틈도 없이 매일을 견디며 살기 바빴다. 혹여라도 지금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 분들에게 작은 위로가 될 수 있지도 않을까 감히 생각해 보았다. '이 또한 지나갑니다. 꼭 버텨내십시오. 그래서 꼭 잘 살아내십시오.'
다만, 견디고 버텨내는 삶이 너무 고되고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다만, 그 힘든 시간이 너무 길지 않게 빠르게 지나가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