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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정 May 02. 2023

오늘도 후추 스프레이를 들고 귀가 중

해야 하는 것, 할 수 있는 것, 그리고 하고 싶은 것.

마포구 성산동. 이곳에 산 지 44일째다.


조용해서 살기 좋지만, 밤이 되면 으슥해지는 곳. 다홍색 벽돌과 실금을 때운 흔적이 역력한 콘크리트로 지어진 연립 주택촌. 이곳에 산 지 일주일이 지났을 때 난 쿠팡에서 호신용 후추 스프레이 하나를 주문했다. 낯선 남자가 내 뒤를 따라온 이후였다. 대로와 연결된 골목에서 10여 미터 정도 들어와야 내가 거주하는 빌라의 공동 출입문이 나오는 구조상 그는 나와 같은 빌라에 사는 이웃이어야 했다. 내가 사는 연립주택 말고는 다른 길도 없으니 말이다. 때마침 나타난 오토바이 배달부까지 도합 3명이 비좁은 엘리베이터에 함께 탈 생각에 미리 시무룩 해하고 있는데, 자동 센서로 밝게 점등된 빌라 지붕 아래 서 있던 남자가 홀연히 사라지고 없었다.


배달부랑 우연히 맞닥트린 게 행운이었던 걸까. 무슨 꿍꿍이로 그는 내가 사는 빌라까지 왔다 되돌아 나간 것일까. 불특정 다수가 혼재한 대도시에 살며 나는 굳이 그런 질문의 답을 구하려 들지 않는다.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경비원이 지키는 아파트가 아닌 어둡고 좁다란 골목에 다닥다닥 붙은 단독주택이나 연립주택에만 살아본 내게 그런 종류의 위협은 슬프게도 놀라운 것이 아니다. 하필 하이힐을 신고 있어서, 듣고 있던 이어폰이 떨어져서, 함께 있던 친구가 너무 무서워해서 차마 앙갚음하지 못한 수많은 치한과 무례한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그들도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이 도시의 구성원이다. 절대 사멸하지 않고 증식하는 암세포와도 같은 존재다.


"인정, 여기선 절대 혼자 거닐지 마."


7년 전, 나는 애리조나주 투손의 다운타운에서 축제를 즐기고 있었다. 미국에서의 첫 핼러윈 데이였다. 다운타운은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많은 사람들이 코스튬을 한 채 밤거리를 활보하고 있었다. 눈구멍 뚫은 골판지 박스를 뒤집어쓴 채로 길가에 기대앉아 행인에게 밝게 인사하는 홈리스를 바라보며 저게 진정한 핼러윈 스피릿이라며 감탄하는 내게 슈는 충고하는 듯 그렇게 말했다.


(핼러윈 데이의 흔한 풍경. 축제에 진심인 미국인답게 그날의 다운타운은 마치 놀이동산처럼 화려하게 변모했다. 사진= 박인정)


'응? 왜 혼자서 거닐면 안 돼?'라고 내가 물어봤던가. 대답을 듣지 않고도 대충 그 이유를 파악하긴 했다. 슈는 나와 같은 아시안 여자였고, 고등학교 때부터 미국에 거주한 터라 미국살이는 나보다 한 수 선배였다.


”Strangers.“


슈가 덧붙인 말에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방이 이방인 천지이긴 했다. 그렇다고 특별히 위험해 보이는 사람은 내 눈에 띄지 않았다. 어쩐지 오기가 생겨 혼자 돌아다니고 싶은 마음이 생겼지만, 슈와 그의 남편과 내 남편을 위해 참기로 했다. 동양인이라서. 그리고 여자라서. 내가 몸을 사려야 하는 이유는 아마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텍사스에 살게 된 이후로 나는 밤에 밖을 나가지 않는다. 6년간 살았던 인구 60만 명의 투손은 그렇다 치더라도, 현재 사는 인구 9만 명의 작은 마을에선 저녁 외출을 해도 딱히 할 게 없다. 대중교통이 없으니 맥주 한두 잔을 마시러 펍에 들르려 해도 반드시 차를 끌고 나가야 하고, 집에 갈 때는 주차장에 차를 대고 우버를 불러야 하거나 대부분의 미국인처럼 경찰의 눈을 피해 운전대를 잡아야 한다.


일주일에 한 번 남편과 함께 식료품 쇼핑을 하거나 아파트 단지 내에 마련된 피트니스 센터에 운동하러 가는 것 말고는 딱히 외출하지 않는 삶이 반복되자 음험한 서울의 밤거리마저 사무치게 그리워질 지경이었다. 저녁 8시, 명동국립극장에서 공연을 보고 나오는 내 다리가 홀린 듯 명동성당으로 향했다. 밤 10시까지 성당을 개방하다니. 감개무량한 마음으로 성모 마리아에게 인사하고 나온 나는 코로나 이전으로 완전히 회복한 명동거리에서 양꼬치 하나와 맥주 한 캔을 사서 그 자리에서 해치웠다. 아시안 여자 혼자. 자정이 가까워지는 데도 혼자.


한국의 서울은 미국의 LA나 맨해튼처럼 더럽고 복잡하다. 무례하고 불친절한 사람들로 눈살을 찌푸릴 때도 적지 않다. 그러나 그만큼 다양한 인프라가 구축되어 있고, 24시간 꺼지지 않는 활기와 휘황한 빛으로 전 세계 사람들을 끌어들인다. 지나친 경쟁구조와 숨 막히는 공해 때문에 탈서울을 희망하는 사람들에게도 KTX로 서울이 얼마나 걸리는지는 중요한 체크 포인트이다. 직업 때문에, 그놈의 인프라 때문에 좋든 싫든 서울에 뿌리를 한 가닥이라도 걸쳐야 마음 한쪽이 편안해지는 것이다.


'동네 목욕탕에서 44도 열탕에 들어갈래? 아니면 18도 냉탕에 들어갈래?' 어느 책은 내게 그렇게 묻는다. 열탕은 대도시의 좁아터진 삶이고, 냉탕은 사회 시설 기반이 하나도 없는 섬과 같은 외딴 삶을 일컫는다. 냉탕에서는 누구나 열탕에 가려 하고, 열탕에서는 숨이 막혀도 그걸 견디며 산다. 가분수처럼 모든 것이 수도에 집중된 한국에서 38도의 온탕처럼 적절한 공간과 인프라가 갖춰진 곳은 찾아보기 어렵다. 내 눈에 그런 서울은 위태롭다. 커다란 머리를 제대로 가누지 못한 채로 아슬아슬한 줄타기하는 기인처럼 보인다.


(대학로 골목을 거닐다 우연히 마주친 ‘마로니에빌라’. 지나간 세월이 이 빌라에게 새 이름을 선물했다. 사진=박인정)


그런데도 난 이곳에 산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서울에 23킬로짜리 캐리어 두 개를 풀었다. 배수구 주변은 짤막한 담배꽁초와 껌 자국으로 범벅이고, 취객은 내 어깨를 치고 밤길 어귀로 비틀비틀 사라진다. 그 모든 걸 감내할 수 있는 이유는 내가 여기 살지 않아서다. 내 가족과 친구가 사는 이곳을 지난 7년간 그러했듯 곧 떠나야 하기 때문이다. 고향인 서울이 관광지가 되어버린 마음은 기묘하다. 자가는 없이 미국에, 그리고 한국에 두 곳이나 월세방살이하는 게 맞는지 의문이 들 때도 있다. 약에 취한 인종차별주의자가 겨눈 총구를 맞닥트릴 일이 없다는 사실에 그나마 안도할 뿐이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어디서 살아야 할지. 요즘 내 머릿속은 북촌의 구불구불한 골목길 같다. 별의별 생각이 정리되지 않은 채 봄날의 꽃가루처럼 흩날린다. 이 고단한 시기를 극복하려 고군분투하는 노력마저 욕심 같아 어떤 욕심도 부리지 못한 채로 2호선 순환 열차 같은 생각에 몸을 맡기고 한참 동안 멍을 때리곤 한다. 그러다 내릴 역을 놓치고 만다. 누군가 말했다. 하늘과 꽃을 바라보며 감탄할 줄 아는 사람은 아직 낭만을 아는 사람이라고. 오래간만에 미세먼지가 걷힌 하늘에 뜬 얄따란 초승달을 올려다보며 나는 가방에서 후추 스프레이를 꺼내 든다. 낭만은 모르겠고, 아직 시력은 괜찮은 것 같다. '걱정하지 마. 웬만한 치한은 내가 눈싸움으로 이겨.' 아직 아침인 텍사스에서 전화를 걸어온 남편에게 나는 말한다. 스프레이 사출구를 정면으로 향하게 잡아들며 이따금 뒤를 돌면서 말이다.


 김미향 저, 한겨레출판 <탈서울 지망생입니다>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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