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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정 May 19. 2023

웰컴이 빠진 베이비 박스를 찾아가다

너의 다음 어린이날은 부디 맑고 따뜻하기를.

어린이날은 비가 많이 내렸다. 다음 날 비탈진 길을 오르는 내 우산살 사이로도 빗물이 샜다. 마을버스에서 내리고 나서도 족히 10분은 올라가야 하는 헐떡고개. 그 초입에는 어린 아이들이 뛰노는 초등학교가 있었다. 지금이라도 마음을 달리 먹자고. 왔던 길을 되돌아가자고. 어떤 마음으로 그들은 이 길을 올랐을까. 젖도 안 뗀 갓난쟁이를 보물단지처럼 끌어안고 마지막까지 망설였을까. 아님, 애물단지처럼 떠안고 당장이라도 놓을 생각을 했을까. 짚어지지 않는 심정으로, 점점 가빠오는 날숨으로 나는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뚫고 가파른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다. 한국 최초의 박스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베이비 웰컴 박스'. 그것은 미국에서 출산을 앞둔 사람들에게 제공하는 육아용품을 뜻한다. 아마존, 월마트, 타켓같은 대형 쇼핑몰에서 배송해주거나 픽업할 수 있다. 회사마다 조금씩 정책은 다르지만, 중복 수령도 가능한데다 거의 무료라고 할 수 있는데, 많게는 150불 정도의 베이비 웰컴 박스들을 전부 모으면 꽤 쏠쏠하다. 기저귀 발진 크림이나 수유패드는 따로 살 필요가 없고, 젖병 같은 소모품도 4개는 거뜬히 모을 수 있어 미국에 사는 예비 부모라면 반드시 챙기는 혜택이다. 정부 기관도 아닌 민간업체에서 산모와 신생아를 위한 무료 선물상자를 제공하다니. 잠재적 고객을 유치하기 위한 사업 수단일지라 해도 꽤 파격적이라고 할 수 있다. 부모가 불법체류자일지라도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신생아에게만큼은 독수리가 박힌 미국 여권을 줄 만큼 젊은 세대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아끼지 않는 미국다운 자세라 할 수 있다.

(아마존에서 제공하는 베이비 웰컴 박스. 10달러 이상 제품을 구매하면 무료로 이 박스를 받아볼 수 있다. 사진= Free Stuff Finder)


그러나 내가 찾아간 박스는 그런 종류의 박스가 아니었다. 그것은 단단한 철로 만들어져 여름엔 무척 덥고 겨울엔 무척 추워 항상 팬이 돌아가고 바닥엔 열선이 깔린 1미터 남짓의 상자였다. 원래는 밖에서 자유롭게 열게 되어 있다가 누군가 몰래 문을 열고 갓난아이를 훔쳐 간 이후로 한 번 밖에서 열리면 자동으로 잠겨 교회와 연결된 안에서만 열릴 수 있게 바뀐. '베이비 박스'. 그게 바로 그 상자의 이름이다.

대학 시절, 2년을 사귄 남자친구 J는 한국에서 태어나 스웨덴에서 사는 입양아 출신이었다. 교환학생 신분으로 한국을 방문한 J는 첫 만남부터 덤덤하게 자신의 사연을 밝혔다.

그들과 닮은 듯 닮지 않은 J는 유독 키가 크고 희었다. 스웨덴 인이지만 너무도 이 나라 사람 같은 외양에 어리둥절해하는 사람들한테 어릴 적 한국에서 스웨덴으로 입양됐다고 스스럼없이 대답하곤 하던 J는 항상 태연해 보였다. 입양아 출신이라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하는 것처럼도 보였다. 홈플러스 수입코너에서 사 온 큼직한 유럽산 치즈 한 덩이를 뜯은 자리에서 단번에 해치우는 식으로 향수병을 달래는 J를 보며 나는 태어나지 않고 자라 온 곳도 그리운 고향이 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나를 키워 준 부모가 나의 친부모라는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전제 조건이 그릇될 수 있다는 것 또한 말이다.

5월 6일 내가 만난 베이비 박스는 첫 봉사활동을 하러 온 나 같은 사람에게 보여주는 역사이자 상징이었다. 현재는 부드럽게 마감되고 대폭 개선된 베이비 박스가 설치되어 운영되고 있다고 했다. '코로나 특수를 누렸죠.' 봉사자 인솔을 맡은 OT 담당자가 아쉬운 말투로 말했다. 코로나 시국이 끝나가면서 기부나 봉사활동이 확연히 줄었다고. 이번 어린이날에도 기부 물품이 예상만큼 많이 들어오지 않았다고. 그가 건넨 명단에 내 이름과 생년월일을 적으며 나는 빗물에 젖은 양말을 꼼지락거렸다. 이제 막 난방을 튼 바닥에서 서서히 훈기가 올라왔다.

(베이비 박스를 운영하는 교회의 전경. 아기를 보다 안전히 두고 갈 수 있는 베이비 룸도 상시 운영하고 있다. 사진=박인정)

나는 분유통을 정리하고, 아기 기저귀를 단계별로 옮겼다. 당장 갈 곳 없는 미혼모들을 위한 임시 거주지로 쓰이다 자꾸만 자립을 미루려는 엄마들이 늘어나자 창고로 용도 변경된 곳에서 분유통 위에다 큼직하게 유통기한을 적었다. 개미처럼 열을 맞춰 기저귀를 옮기고 미혼모 가정에 공급할 세탁 세제를 새지 않게 단단히 봉하고 테이프로 마감하고 나니 일이 끝났다. 우산꽂이 아래 처박혀 흐물거리는 우산을 꺼내 들고 다시 밖으로 나오니 하늘에선 여전히 빗줄기가 떨어지고 있었다. 내리는 게 눈이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아찔한 길을 내려와 마을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는데 또다시 초등학교가 보였다. 아기를 상자에 눕히고 빈손으로 그 앞을 지나는 어린 부모의 뒷모습이 그 앞에 덧그려졌다. 싸구려 우산살 사이로 새는 빗물은 자꾸만 내 뺨과 정수리로 툭툭 떨어졌다.

요즘 아이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한다. 사랑스러운 내 아이를 가지고 싶다는 소망과 함께 이미 세상에 나왔으나 사랑받지 못하는 수많은 아이들을 떠올린다. 누구는 그토록 간절히 가지고 싶어 하는 어린 생명이, 어떤 이에겐 외딴 상자에 유기할 만큼 버거운 짐이라는 사실은 엄마의 삶을 조심스레 가늠해보는 내게 반드시 건너야 하는 징검다리처럼 적용한다. 이상하게도 그렇다. 베이비 박스 앞 복도, 포대기에 싸인 작고 빨간 갓난아기는 잠시 울었다가 새근새근 잠이 든 얼굴로 얼떨결에 나를 포함한 봉사자들과 대면했다. '아기 얼굴은 원래 보여주는 게 아니에요.' 초보인 듯한 아기 돌보미를 인솔해 얼른 아기방으로 들어가는 관계자의 뒤에 놓인 화이트보드엔 아기의 생일이 적혀있었다. 4월 13일. 태어난 지 채 한 달도 되지 않은 아기의 첫 어린이날이 바로 어제였다.

몇 번 더 징검다리를 건너볼 생각이다. 불편한 마음은 제일 편한 복장에 묻고, 다만 손과 발을 보태보려 한다. '그래도 요즘엔 베이비 박스를 열어 볼 일이 대폭 줄었어요. 올해는 고작 두 명의 아이만 입소했거든요.'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다. 환영한다고, 이 세상에 태어나줘서 무척 고맙다고. 베이비 웰컴 박스를 누릴 기회가 없던 아기들의 분유와 기저귀를 옮기는 것으로 나는 그들이 응당 들어야 했던 말들을 대신한다. 그렇게 내 안의 징검다리 폭을 빗방울만큼 좁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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