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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정 Aug 19. 2022

단지 잘 마른 속옷을 입고 싶었어.

언젠간 나만의 세탁기를 가질 거라 믿으며.


오래전 이야기다. 코인 세탁소도, 건조기도 잘 없던 시절의 이야기. 또다시 살던 곳을 떠나야 하는 날짜가 임박해서일까. 슬슬 짐 쌀 준비를 하며 문득 말도 많고 탈도 많던 첫 고시원살이를 반추하게 된다.


그곳은 301호였다. 사람 한 명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어두침침한 좁은 복도의 가장 막다른 방, 빨간 손전등 하나 덩그러니 걸려있는. 화장실은 공용이었고 세탁기 또한 마찬가지였다. 옥상엔 언제나 빨래 바구니가 한두 개쯤 줄 서 있는 통돌이 세탁기가 놓여있었다. 더럽거나 깨끗해진 빨랫감을 들고 가파른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는 동안, 종일 멈추지 않는 원심력으로 세탁기 아래 괴여진 붉은 벽돌들은 조금씩 삐뚤어져 갔다.


처음부터 옥상에 속옷을 널고 싶었다. 초록색 방수페인트로 반들거리는 드넓은 옥상엔 제법 쓸 만한 빨래 건조대와 빨랫줄이 상시 비치되어 있었다. 문 하나 턱 하나 넘으면 나오는 옥상은 누가 봐도 세탁이 끝난 빨래를 너는 데 최적의 장소였다.


문제는 속옷이었다. 내 여성 속옷이었다. 전망이 탁 트인 옥상은 잠깐이라도 숨통을 트이고자 들숨에 담배 연기를 빨아들이려는 고시원 거주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고, 여자 층인 3층보다 인접한 4층 남자들의 출입이 아무래도 잦았다. 망설이는 나를 움직인 건 어쩌면 시기였다. 볕 좋은 날, 천장산에서부터 불어오는 산들바람에 만국기처럼 펄럭이며 짱짱하게 말라가는 트렁크 팬티를 향한 왠지 모를 치기였다. 그래서 난 벽돌을 집어 들었다.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해가 지기 전, 잘 마른빨래를 기대하며 설레는 마음으로 다시 옥상을 찾은 나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바닥에 아무렇게나 흩뿌려진 내 옷가지들이었다. 빨래 건조대는 벽돌이 괴인 채 그대로였는데 내 옷들만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빨래를 널 때는 분명 비어있던 기다란 빨랫줄에는 얇은 이불과 각종 옷가지가 걸려 나부끼고 있었다. 그 많던 빨래집게가 모두 거기에 모여 있었다.  


내 속옷 한 장은 바람 빠진 테니스공과 사이좋게 안 쓰는 책상이며 의자를 모아둔 후미진 곳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채 발견되었다. 용케 매달려있는 빨래집게는 부당한 공격에 끝까지 맞선 어느 게의 몸에서 떨어져 나간 집게발처럼 처연해 보였고, 못 쓰게 된 내 속옷을 집어 들어 담배꽁초 가득한 쓰레기통에 버리는 내 심정은 강제로 발이 뜯긴 게와도 같았다.


옥상을 떠나기 전, 나는 서서히 물드는 노을을 배경으로 고즈넉하게 펄럭이는 체크무늬 트렁크 팬티에서 빨래집게를 모조리 뺐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출입문으로 향했다. 그렇게 6개월을 버텼다. 팔 한 짝 뻗으면 맞은편 벽에 어깨가 닿는 비좁은 방에서 속옷을 말리고 개키다 마지막 수업 종강과 함께 그 고시원을 떠났다.


볕 좋은 날, 5개월을 머문 연남동 월세방에서 찍은 몬스테라. (사진=박인정)



대학 입학과 동시에 열다섯 번이 넘는 월세와 깔세 방 살이를 전전하며 떠돌아다녔으나, 점점 숙달되는 짐 싸기와는 별개로 언제나 어려운 것이 이사다. 버릴 것과 팔 것을 구분하고, 놓고 갈 것과 챙겨갈 것을 정하는 일. 한때는 비우는 과정을 즐기기도 했으나 그것도 한두 번이지, 반복되는 이사에 점점 닳아가는 물건과 소용되는 시간이 아쉬울 따름이다.


고등학교 친구가 써 준 편지 묶음, 내가 그린 그림 수첩, 하나씩 모으고 오린 2000년대 영화 포스터 등 돈이 되지는 않지만 살 수 없는 소중한 추억들은 이번에도 나보다 먼저 한국을 떠났다. 몇 개월을 거쳐 태평양을 횡단하는 화물선에 실리기 위해서다.


이제는 내 몸을 비행기에 태울 차례다. 5개월의 짧지만 길었던 한국 체류를 뒤로 하고 다시 미국으로 말이다. 언제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막연하던 곳으로의 복귀인 만큼 기쁘기도 하지만, 새로운 땅에서의 새로운 시작이라 막연한 것도 사실이다.


나도 나만의 세탁기를 누릴 기회가 있었다. 꼬박꼬박 융자금을 갚으며 한곳에 정착해 삶을 꾸려나갈 기회가 말이다. 그 누구도 종용하지 않은 방랑의 길이다. 그렇기에 누구보다 나를 믿어야 하는데, 무엇보다 그게 힘들 때가 있다. 수화물 초과 무게인 23kg가 넘지 않게 손톱이 깨져라 몇 번이고 짐을 싸고 풀다 보면 유독 그렇다.


떠돌이란 언제 통 세척을 한 지 모르는 세탁기에 빨래하며 그걸 깨끗하다고 여기며 사는 사람이라 생각한다. 월세방 옵션으로, 아파트 공용으로, 코인 세탁기로 누가 어떻게 썼는지도 모르는 세탁기에 빨래를 넣고 돌리면 깨끗해질 것이라 믿는. 눈 가리고 아웅 식의 처신에도 근근이 만족할 줄 아는.


다양한 인종과 개와 고양이들과 세탁기를 공유하는 삶이 언제까지 지속될까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오는 날이면 다사다난했던 첫 고시원 생활을 떠올린다. 그 시절 불었던 산들바람과 푸른 위로가 된 산 공기를 맡아본다. 자연풍도 좋고, 건조기도 좋다. 언젠가 나만의 세탁기를 가질 거라고, 짱짱하게 마른 옷감에 얼굴을 파묻고 미소 짓는 날이 올 거라 믿으며 다시 손가락 관절에 힘을 싣는다.


떠도는 덕분에 비행기 탈 일은 많다. (사진=박인정)



여러 날이 정신없이 흘렀다. 진득하게 궁둥이를 붙이고 퇴고할 시간 없이 병원으로 향하는 지하철에서, 친구를 기다리며 잠시 들른 카페에서 이 글을 쓰다 자전을 따라 비행하는 기내에서 마무리 짓는다. 기내 창을 통해 들어온 타원형 햇빛이 느릿느릿 하강하며 키보드를 훑고 지나간다. 까마득히 멀었던 땅은 어느덧 가까워져 시원하게 뻗은 도로와 상업시설의 네모난 옥상들이 직접 눈으로 읽힌다.


이 땅에선 얼마나 살다 떠나게 될까. 정해진 것은 없고, 우리의 내일은 여전히 아득하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 날아왔으니 일단 안착하고자 한다. 적어도 여긴 건조기가 상용화되어 있으니 젖은 빨래를 널어놓고 걱정할 필요 없으리라. 정 찜찜하면 속옷 정도는 손빨래하며 살리라. 희망하고 다짐하며 마지막 터뷸런스를 견뎌본다. 이제 곧 착륙이다. 활주로에 닿으며 심하게 요동하는 기체처럼 내 마음이 흔들린다. 두렵고 설렌다.


게이트가 점점 가까워진다.


영월매일에 동시 연재되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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