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인정 Aug 18. 2022

선인장 마을에서  프로 당근러가 되는 법.

아주 좋은 걸 들여놓지 않아도 아주 불행하지 않은 삶.


먼저 줄자가 필요하다. 500mL짜리 생수통이나 휴대전화와 함께 사진을 찍어 올려도 무방하나 미리 질문 공세를 피하기 위해서다. 비죽 튀어나온 몇 cm만으로도 집 안 동선이 엉망이 되는 협소한 공간에 사는 도시 사람들과는 달리, 여기 사람들은 훌라후프 세 개 정도는 한꺼번에 돌릴 수 있을 만큼 넓게 사는 편이라 규격에 그다지 민감하지 않다. 하지만 내가 민감하다. 그 질문이 영어라면 더더욱 말이다.


여기는 미국 애리조나주의 투손(Tucson)이라는 지역이다. 차로 한 시간을 달리면 멕시코 국경이고, 라임즙과 고수를 듬뿍 넣은 우설 타코가 기가 막히며 봄이면 선인장 머리에서 마치 화관처럼 새하얀 꽃들이 피어나는. 이곳의 숲은 밤이 되면 매우 고요하다. 나뭇잎과 가지가 스치는 소리나 흐르는 물소리 없이 가시만 빼곡한 키 큰 선인장의 그림자만 천천히 길어지다 밤길을 걷는 산책자들의 발등을 덮곤 한다. 관광지로 오기에 충분히 매력적이고, 유학지로 오기엔 충분히 고립된 이곳에서 나와 남편은 햇수로 6년을 버텼다. 그리고 마침내 떠날 자격이 주어졌다.


봄을 맞아 개화하기 시작하는 사와로(Saguaro) 선인장 (사진=박인정)


줄자를 챙긴 나는 결연한 표정으로 샤워 커튼을 걷는다. 서재 한구석, 안 쓰는 물품들을 보기 좋게 가리고 있던 각양각색 해저 동물이 그려진 샤워 커튼을 말이다. 온갖 잡동사니가 모습을 드러낸다. 아크릴 물감이 덕지덕지 묻은 알루미늄 이젤, 값비싼 앰프, 새것 같은 새장, 먼지 쌓인 우쿨렐레 등 내가 산 것들과 남에게 받은 것들이 한데 뒤섞여 지난 6년간의 과소비와 과하게 받은 사랑을 반추한다. 하지만 반성과 추억도 잠시, 나는 하루라도 빨리 이 50년 된 임대 아파트를 비우고자 얼른 줄자를 뽑아 든다.  


마치 입양을 보내는 마음이다. 각도를 달리하고, 역광을 피해 가장 좋은 앵글을 찾아 정성껏 사진을 찍고 치수를 잰다. 그리고 ‘작동 잘 됩니다’, ‘새것 같습니다’, ‘팔 것을 대비해 깨끗하게 썼습니다’라는 설명과 함께 각종 세부 사항을 덧붙인다. 과장이 아니다. 실제 임보하는 마음으로 지난 6년간 물건들을 사용해 온 우리 부부다. 42인치 티비의 테두리 보호 스티커는 여전하고, 담요를 세 겹 덮고 사용한 카펫은 숨이 좀 꺼졌을 뿐 새것과 다름없다.


숨을 좀 살리고 값을 더 치르고자 카펫의 격자무늬를 따라 진공청소기로 미는데 메시지 도착 알림음이 울린다. 우쿨렐레를 사고 싶다는 잠재 구매자의 메시지다. ‘탬버린과 셰이커도 판매하는 거죠? 함께 구매 가능할까요?’라는 이어진 질문에 나는 얼른 진공청소기를 멈추고 ‘YES’ 뒤에 해맑게 웃는 노란 얼굴을 덧붙인다.


무대에 서게 된 건 순전히 우연이다. 미국인들 앞에서 미국말로, 때론 한국말로 노래를 부르며 찰랑찰랑 탬버린을 흔드는 무모한 용기는 잠시나마 향수를 달래는 힘으로 작용했다. 함께 공연하곤 했던 동료들은 학위를 마치고 하나둘씩 떠나며 우리에게 아쉬운 작별 인사와 함께 기타나 앰프를 남겼고, 마침내 떠날 차례가 된 우리는 그간 모인 악기와 기기를 중고 사이트에 부지런히 올리는 중이었다. 사람들 앞에서 마이크를 잡기 어려운 전염병의 시대, 불가사리나 조개 따위가 그려진 낡은 샤워 커튼 아래 잠자다 버려지는 것보다야 누군가에게 음악이 되어주는 게 훨씬 나으리라는 생각에서다. 물론 가난한 유학생 부부의 이사비용을 덜기 위함도 있다.


약속 시각이 되자 나는 쇼핑백을 들고 아파트 주차장으로 향한다. 미리 도착해 날 기다리고 있던 잠재 구매자는 그가 몰고 온 차만큼이나 커다란 덩치의 소유자다. 그리고 맨발이다. 나는 애써 그의 크고 두툼하며 맨발 경력이 상당해 보이는 벗은 발을 보지 않으려 노력하며 쇼핑백에서 우쿨렐레와 셰이커를 꺼내 보여준다.


조금 젖어버린 탬버린 가죽을 의뭉스레 바라보는 그에게 먼지를 닦아내느라 그랬다며, 곧 마를 거라는 말을 덧붙이며 나는 그가 차는 몰아도 신발은 신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지, 유리 조각이나 선인장 가시에 찔려도 끄덕하지 않을 정도로 질긴 발 가죽의 소유자가 아닌지 문득 궁금해진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주머니에서 꺼낸 구깃구깃한 10달러 두 장을 내게 건넨다.  


그렇게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5달러짜리 중고 드라이어를 사기 위해 번쩍이는 BMW를 몰고 온 어느 히스패닉 여성은 집에 놀러 온 사촌이 몰래 제 드라이어를 가져갔다고, 심지어 공항에서 압수당했다며 여전히 어이없다는 표정이었다. 눈을 전부 가리는 단발머리 손자와 함께 새장을 구매하러 온 할머니는 삯을 치르는 그 순간까지도 새장의 품질을 의심했다. 매년 겨울마다 우리 안방을 따뜻하게 해주던 히터를, 밤을 밝혀주던 갓등을, 푸른 위로가 되어준 테이블 야자수를 하나둘씩 새 사람들에게 안겨주다 보니 결국 캐리어 6개만이 남아 우리와 함께 인천행 비행기에 실리게 되었다.


캐리어 6개와 가방 2개로 축약된 투손에서의 6년 (사진=박인정)


그런 삶은 이 글을 쓰는 여기 마포구 연남동에서도 계속된다. 가지는 것보다 놓고 가는 게 더 많은 삶에 언제부터 익숙해졌는지 모른다. 어차피 버리거나 팔아버릴 것이라고 생각하면 비싸든 저렴하든 아주 좋거나 크게 싫지 않다. 어떤 물건을 살 때 당장 내 기호보다는 일단 캐리어에 들어가는지, 검역에 걸리지는 않는지 견적부터 뽑아본다. 무슨 차를 살지 고민하고, 쑥쑥 자라는 아이 때문에 점점 좁아지는 집을 걱정하는 친구들에게 우리 동네 선인장이 얼마나 컸었는지, 하늘은 얼마나 파랬는지 말하는 집도 차도 없는 내가 조금 어른스럽지 않다는 생각이 들긴 한다. 그래도 자랑할 건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끔 궁금하다. 한때는 내 것이었던 새장과 카펫과 탬버린은 어떤 삶을 살고 있을지. 발 벗은 자의 손에서 우쿨렐레는 제대로 소리를 내고 있을지. 투손을 떠나기 며칠 전, 나는 겨울옷이 가득 찬 이민 가방에 칠레산 카르미네르 포도주 한 병을 잘 포장해 집어넣었다. 중고 거래로 친해진 클래식 기타리스트이자 남편과 동문인 파울로가 선물해 준 것이었다.


한국에 도착하고 맞은 첫 크리스마스 이브에 우린 그걸 땄고, 함께 포도주잔을 기울이며 빠듯한 주머니 사정에도 불구하고 먼 길 떠나는 이방인 커플을 챙겨준 고마운 마음을 다시 한번 되짚어보았다. 어쩌면 지난 6년간 우리가 배운 건 부족하거나 없다고 울지 않는 넉살, 아주 좋은 걸 들여놓지 않아도 아주 불행하지 않아 밤의 숲을 산책하고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며 서로 어깨를 두드려주는 요령이 아닐까 싶다.


서서히 밤이 내려오는 사막의 숲 (사진=박인정)


영월매일에 동시 연재되는 글입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