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이 되어버린 낭만, 갯벌밭이 되어버린 축제장
올해 8월 말, 예전엔 호수가 있었던 드넓은 자리엔 이번에도 7만 명 이상의 인파가 모여들었다. 미국 네바다주 블랙록 사막의 한 전경이다. 고속도로를 벗어나 울퉁불퉁하고 뿌연 먼지가 이는 비포장 사막길을 달려 도착한 거대한 임시 도시에는 전기가 통하지 않고 인터넷도 터지지 않는다. 행사가 진행되는 일주일 하고도 이틀의 시간 동안 마실 물은 물론이고, 식사나 잠자리도 알아서 자급자족해야 하기에 세계 각지에서 몰려온 이들의 자동차 트렁크나 트레일러는 생필품과 직접 만든 귀걸이나 레몬 잼 등 물물교환할 제품들로 꽉꽉 들어찼다.
유난히 세찬 먼지바람을 불평했을 뿐, 첫날만 해도 그들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수천 년 전 메마른 호수 바닥이 거대한 갯벌이 되어 그들의 발목을 붙들리라고는 말이다. 스스로 버너라고 일컫는 그들의 포용, 기부, 자립 등 10가지 규칙 중 가장 중요한 규칙은 모든 금전거래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1986년 샌프란시스코의 어느 한적한 해변에서 2.4미터짜리 사람 형상의 목각인형을 태우는 것으로 시작된 소규모 모임은 이제 버닝 맨 페스티벌이라는 이름의 국제적 행사로 자리매김했다.
버닝 맨 축제가 머드 축제가 되기 3주 전, 나는 서울 마포구의 어느 숙소 로비에 앉아 친구 부부를 기다리고 있었다. 영국인 남편과 함께 그의 고향에서 새로운 삶을 계획하는 친구가 런던행 비행기를 타기 전 나와 같은 숙소에 머물고 있던 때였다. 저녁을 들지 않은 친구의 남편이 피자를 사 오겠다고 잠시 자리를 뜨고, 나와 내 친구가 그들이 키우는 반려견 클래시코의 재롱을 보며 수다를 떠는데 우리 주변이 점차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때마침 돌아온 친구 남편을 맞이하는데 어느새 드넓은 로비가 낯선 외국인들로 꽉꽉 채워져 있었다. 내가 사는 곳이 웬만한 대학교 기숙사 버금갈 정도로 큰 규모의 숙소이기는 해도 여전히 공사 중인 데가 많고, 빈방이 수두룩했는데 의아한 일이었다. 가만 보니 그들이 차고 있는 스카프가 눈에 익었다. 조금 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느닷없는 무대 공연으로 시끌벅적했던 홍대 레드 로드에서 맞닥뜨린 사람들의 목이며 배낭에 채워진 빨강, 파랑, 흰색이 꽈배기처럼 교차한 스카프였다. 새만금 캠프장에서 조기 철수한 잼버리 친구들이었다.
그제야 이른 아침 숙소 이곳저곳을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뭔가 열심히 체크하던 119구급대원들이 이해되었다. 지하 주차장으로 향하는 길목에 떡 하니 주차된 응급차도 말이다. 국제적 행사에 참석하는 대규모 인원을 수용하기 전 혹시나 생길 위험 요소를 미리 파악하고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로비에 잼버리 스카우트 대원들이 나타난 시간은 밤 10시쯤이었다. 탑처럼 수북이 쌓여 식어가고 있던 피자며 1.5리터짜리 콜라 주인이 누군가 싶었는데, 아직 씻지 못한 채로 펄과 땀 냄새를 풍기는 어린 친구들이 피자 박스가 쌓인 기다란 테이블 앞에 앉아 피자 조각을 집어 들기 시작했다. 지친 듯, 입맛이 없는 듯 느릿느릿 피자를 씹는 어느 밝은 금발의 소년과 눈이 마주치자 우린 반갑고도 안쓰러운 눈인사를 건넸다. 제 몫의 피자를 드는 어두운 금발의 친구 남편까지 합세하자 그날 밤 숙소의 풍경이 무척 이국적이면서도 짠했다.
'새만금 세계 스카우트 잼버리 야영장 철수로 인해 잼버리 청소년들이 머물고 있습니다. 공용공간 사용에 불편함이 있더라도 너그러운 양해 부탁드립니다.'라고 적힌 공지가 붙은 건 다음 날 오후가 되어서였다. 코워킹 플레이스로도 이용되던 한적한 로비가 정말 대학교 기숙사 풍경이 된 게 그때부터다.
달라진 전 그뿐만이 아니었다. 공용 주방의 쓰레기통엔 일회용 용기가 넘쳐나기 시작했고, 분리수거 통에 처박힌 먹다 남은 음식물에선 쉰내가 진동했다. 파리는 떼로 불어났다. 본죽인지, 편의점 도시락인지 배급받으려고 길게 줄을 선 청소년들을 피해 빙 돌아가야 할 때도 있었다. 별거 아닌 불편이었지만 따지고 보면 굳이 내가 겪지 않아도 되는 불편이었다. 도미노가 쓰러지듯 벌어진 국가 재난급 사태에 어쩔 수 없이 양보해야 하는 개인의 편의였다. 쓰레기통을 맴도는 파리들은 점점 살이 올랐다. 행사 유치에만 혈안이지, 막상 행사의 안전과 원활한 진행은 등한시하고 떠넘긴 덕분이었다.
그리고 폭염과 태풍 카눈 때문이었다. 나는 내 기억력을 의심하고야 말았다. 이번 여름은 미국 텍사스에 사는 내가 7년 만에 맞이한 한국의 여름이었다. 그러나 반가움보단 놀라움이 더 컸다. 계속되는 열대야에 한강에서 야경을 감상하며 치맥 하는 건 꿈도 꾸지 못했다. 지독한 찜통더위에 하루하루 지쳐가는 나에 비해 한국에 사는 가족과 친구들은 어느 정도 더위에 적응한 모습이었다. 온열 환자가 2,000명 넘게 발생한 2018년 여름보단 덜 더운 거라는 말을 위로처럼 했다.
거기다 태풍 카눈은 무척 느렸다. 140년간 한반도를 관통한 15개 태풍 중에서도 가장 느렸다. 폭염의 정점을 찍은 7월, 바다의 표면 온도가 급상승하면서 늘어난 수증기로 몸집마저 불어난 카눈은 경로마저 제멋대로였다. 작열하는 태양과 종잡을 수 없는 느림보 태풍은 습하고 그늘 하나 없는 간척지에 위태로이 세워진 잼버리 텐트촌 사람들을 내쫓아 조기 퇴영하게 하거나 전국 각지로 떠돌게 만들기엔 충분하고도 남았다.
네바다주 사막 한복판에서 치러진 버닝 맨 페스티벌을 강타한 것 역시 기후 재난이었다. 3개월 동안 내릴 비가 24시간 동안 퍼부어 건조한 사막을 몇 걸음만 걸어도 다리가 푹푹 빠지는 갯벌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자유와 영감을 찾아 외딴 사막을 찾아온 온 버너들은 전기와 인터넷이 통하지 않는 펄 한복판에서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비가 잦아든 틈을 타 페스티벌의 피날레마저 포기하고 부랴부랴 축제장을 떠난 사람들도 적지 있었다. 때아닌 폭우를 두고 예술과 자유의 추구라는 미명 아래 온갖 폐기물과 이산화탄소를 발생해 지구온난화를 촉진하는 버너들을 향한 하늘의 엄벌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초기의 포용적이고 검소한 히피 정신은 퇴색되고, 일론 머스크나 마크 저커버그 같은 특권층의 놀이터가 되어가는 버닝 맨 페스티벌이 개흙밭이 되자 고소해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기후가 엉망이 되어가고 있다고. 이젠 하도 많이 듣고 뱉어 귀와 입이 아픈 얘기다. '역대급'이나 '유례없이'라는 예보나 날씨를 수식하는 단어마저 더는 '이례적'이지 않다. 관측 사상 지구 표면 온도와 해수면 온도가 가장 뜨거웠던 달이 올해 7월이라는 세계 기상 기구(WMO)의 발표를 들으면서도 그렇다. 점차 재난이 되어가는 기후 변화에 여름밤 한강에서 치킨을 뜯는 소소한 낭만을 누리긴커녕, 한강 물이 범람하는 건 아닌가 우려하게 된 지 오래다. 퇴근해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 은행 냄새가 섞인 서늘한 가을바람에 카디건 앞섶을 여미는 것마저 점차 옛것이 되어간다.
매년 토요일 밤에 치러지던 버닝 맨 점화식은 '더 맨'이 빗물에 폭삭 젖어버린 나머지 마지막 날이 되어서야 치러졌다. 12미터짜리 거대한 목각인형은 매캐한 연기와 상당한 이산화탄소를 뿜어내며 다시금 사막의 재가 되었다. 나는 궁금하다. 언제까지 사람들이 불타오르는 목각인형을 바라보며 그것을 낭만이라고 부를 수 있을는지. 자원의 남용과 인류의 오만이 빚어낸 거대한 불꽃이 언젠가 우리의 집과 터전까지 옮겨붙는 건 아닐는지. 확실한 건 아무도 그걸 낭만이라 부르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내가 살던 애리조나주의 레몬 산엔 다시 불이 났다. 지구는 여전히 불타오르고 있다.
영월매일에서 동시연재하는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