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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정 Sep 01. 2023

새벽에 퇴근한 C는 오늘도 글러브를 낀다

불과 역병과 야자수의 이야기

2020년 6월의 어느 아침. 침대에서 일어나 목도한 창문 밖 풍경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마치 불길에 타오르는 거대한 구렁이가 꿈틀거리며 산등성이를 넘나드는 것만 같았다. 산불이었다. 한 달이 넘게 애리조나주 산타 카탈리나 산맥의 119,987에이커(약 485.5701616 ㎢), 축구장 크기로 5만 개 이상의 면적을 태운 초대형 화재로 언제나 푸르르던 투손의 하늘은 부옇게 흐려졌다. 공기 중엔 매캐하게 타는 냄새가 섞여들어 눈과 코가 따끔했다. 인공위성에 포착될 만큼 커다란 산불의 연기가 캘리포니아까지 도달했다는 얘기까지 들렸다. 


불타는 카탈리나 풋힐스. 이 근방에 살던 친구는 걷잡을 수 없는 산불로 서둘러 대피해야만 했다. (사진=박준혁)


산불이 나기 몇 개월 전, 남편은 박사과정 인터뷰를 하러 미국 각지에서 찾아온 학생 중 한 명에게 감기가 옮아 고생한 전적이 있었다. 아무리 약을 먹어도 차도는 없고 증상만 평행선을 그리는 게 의심스러워 검사해보니 다름 아닌 신종 플루였다. 진단받고 처방받자 거짓말처럼 증상이 사라졌다. '이번에도 어떻게든 지나가겠지.' 신종 플루 걸린 남편과 한 달 가까이 동고동락했으나 기침 한번 없던 나는 2019년 말 태평양 건너 고국 근처에서 발발한 'COVID-19'라는 이름의 신종 감염병도 금방 수그러들 줄 알았다. 사실 그때는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까지도 이어지는 지난한 코로나 시국은 이미 그 전부터 걷잡을 수 없는 상태였고, 가뜩이나 고립된 미국에서 유학 생활은 더욱 암담한 앞길을 예고하고 있었다. 


나는 떡국도 못 먹은 상태였다. 새해가 지나자마자 워싱턴주에서 미국의 최초 코로나 발병자가 나타난 여파로 매년 가졌던 떡국 파티를 취소한 것이다. 차로 21시간이나 걸리는 먼 곳이었지만 전염병의 확산은 순식간이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침울한 새해였다. 스파게티 면을 삶는 크고 우묵한 냄비에 핏물 뺀 소꼬리 토막을 꽉꽉 채워 우유처럼 뽀얗게 될 때까지 우린 다음, 부들부들한 떡국떡을 넣고 노란 지단을 올려 남편과 처지가 같은 유학생들과 함께 나눠 먹는 게 내 신년맞이 행사였다. 연구하느라 바빠 또는 생활비를 아끼느라 제때 깎지 못한 더벅머리와 철 지나고 물 빠진 하와이안 셔츠를 걸친 이들과 따뜻한 떡국 한 그릇을 뚝딱 비우는 일. 비만 오면 지붕에서 물이 새어 들어와 겹겹이 페인트를 덧바른 벽 안으로 물고기 부레 같은 물주머니가 생기는 낡은 아파트로 초대였으나 누구도 개의치 않았다. 한 지붕 아래 오순도순 모여 다 같이 한 살을 먹어갈 뿐이었다.


이러다 내년 떡국도 같이 못 먹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예상은 적중했다.) 사회적 거리 두기를 지키고자 툭 하면 끊기는 와이파이 신호를 붙든 채로 컴퓨터 화면 속 친구들 얼굴을 마주하고 와인잔을 기울이는 것도 더는 지긋지긋했다. 결심을 굳힌 우리는 각자 싸 온 도시락을 들고 어느 한적한 공원으로 모였다. 야외 테이블에 한 상 차린 갖가지 음식은 먹음직스러웠고, 푸르른 야자수는 바람결에 느릿느릿 흔들렸다. 눈처럼 휘날리는 잿가루가 섞인 바람이었다. 백두산보다 높은 카탈리나 산맥은 여전히 불이 활활 옮겨붙고 있었고, 산불 빛이 번져 불그스름한 연기로 꾸물거리는 하늘 아래 혹시나 모를 역병의 전파를 막고자 N95 마스크를 쓴 채로 순서대로 음식을 가져와 남처럼 떨어져서 먹는 우리는 무슨 아포칼립스 영화의 엑스트라들 같았다.


빈대떡, 고구마 맛탕, 소고기 볶음면 등 바리바리 싸 들고 온 우리들의 도시락. 팬데믹은 미국 음식에 질린 유학생들의 요리 실력을 일취월장 늘게 했다. (사진=박인정)


그로부터 3년 후인 2023년 6월. 불타오르는 캐나다에서 돌아온 A를 서울 마장동에서 만났다. A 역시 애리조나주 투손에서 알게 된 친구였다. 캐나다 역사상 최악의 산불을 등지고 한국으로 돌아온 A는 그야말로 다행이라는 표정이었다. 어제 자 비행기로 들어와 시차 적응할 여유도 없던 A는 야무지게 기름장에 소고기를 찍어 먹고 청하를 들이켰다. 대전의 어느 연구소에서 일하게 되었다는 A는 마침내 타향살이를 끝마칠 수 있다며 기쁘고 반가운 기색을 내비쳤다. 여전히 투손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B와 이제는 텍사스에 살게 된 나는 그런 A의 잔을 축하와 격려를 담아 연거푸 채워주었다. 


더는 유학생이라고 일컬어지지 않는 투손의 친구들은 내게 새로 찍은 명함을 내민다. 나는 거기에 적힌 회사와 직책을 소리 내 읽어본다. 덥수룩한 머리는 한층 단정해졌고, 짧은 샤프심처럼 수염이 촘촘하던 턱은 매끈하다. 그들은 이제 좀 번듯한 모습이다. 새로운 호칭으로 회사와 연구소와 대학에서 불리고, 중국 또는 미국에서 각자의 터전을 잡고 가고자 하는 길을 모색 중이다.


빌린 돈은 여전히 갚는 중이다. 내 여권에 붙은 미국 비자 스티커엔 2026년까지라고 체류 기한이 쓰여있다. 그 이후로 우리 부부의 삶은 보장된 게 없다. 아마도 계속 떠돌게 될 나의 삶 속 드물게 단단히 뿌리내린 게 있다면 그건 싸리 빗자루로 바닥 쓰는 소리를 내며 흔들리던 야자수 아래 김밥 단무지를 오도독오도독 씹어먹던 기억이다. 언제 꺼질지 모를 거대한 산불과 막연한 미래로 무섭고 두려운 와중에도 함께 도시락을 나눠 먹을 수 있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에 적잖게 안도하던. 청첩장을 받는 자리에 간만에 나타난 C는 익숙한 하와이안 셔츠를 걸치고 왔다. 밀린 일을 처리하고 새벽이 다 되어서야 연구실에서 퇴근하면 종종 체육관을 들러 샌드백을 두드린다는 C의 머리 스타일마저 어쩐지 예전과도 같다. 호칭이 변하고 나이가 들어도 한결 같은 게 있다고. 안부와 축하를 나누고 돌아가는 길에 잘 가라며 너울너울 손을 흔드는 C의 셔츠에 큼지막하게 박힌 빛 바랜 야자수가 여전히 푸르다.  


영월매일에서 연재하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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